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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w. 리네

 듣지 못한 옛 이야기가 있었다. 겨울의 끝에서 얼어붙은, 친우라고 지칭하기엔 스스로의 죄가 너무 커 더 이상 성이 아닌 다른 걸로 부를 수 없는 그녀에게서. 실제로 사후세계라는 게 있어서 죽은 후에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게 한 저를 원망했을지 아니면 생전 담담한 모습대로 괜찮다고 했을지 생을 살고 있는 저로선 도저히 알 수 없었고 만약 말을 했었다고 하더라도 생과 사의 경계는 너무도 깊고도 무서워 닿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무언가를 제게 말했을 거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가 듣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아마 평생 너에게 아무것도 들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이른 시간에 일어난 필레리에 후작부인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곤 그 옆에 있는 설렁줄을 당겼다. 종이 울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문이 열리고 그녀에게 붙은 전속하녀가 쟁반에 차가운 물을 한 컵 가지고 조심스레 걸어 들어왔다. 하녀가 가져온 쟁반 위의 컵에 자연스럽게 손을 뻗은 그녀가 물기가 어린 컵을 잡아들었다. 결혼하기 전 궁으로 출퇴근하던 보좌관 시절에 아침잠을 깰 겸해서 눈을 뜨자마자 부러 차가운 물을 마시던 것이 아예 생활처럼 굳어버린 탓에 더 이상 서기관장이 아님에도 습관처럼 그녀는 아침마다 찬 물을 들이켰다. 느리게, 그렇지만 물 한 컵을 그대로 전부 목 뒤로 넘기고는 빈 컵을 하녀가 들고 있는 쟁반에 올려놨다. 그 쟁반을 한쪽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놓은 하녀가 환기를 위해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여는 일련의 행동을 침대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가 침대 한켠에 있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가을은 가을인지, 바람이 찼다. 창문을 닫으라는 의미를 담아 손을 휘저으니 알아들은 하녀가 열었던 창문을 꼭 닫았다.

 

 "아침은 평소 하던 대로 한 시간 뒤에."

 "알겠습니다, 마님."

 

 그녀가 침대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방금 닫으라고 시킨 창문 너머가 문득 보고 싶어진 까닭이었다. 손바닥에 닿는 유리의 차가운 질감에 잠시 몸을 움츠렸지만 계속 손을 대고 있으려니 시원한 느낌이 몸을 휘감는 것 같아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바람이 정원의 나무를 한껏 휘저었던 건지 앙상해진 나뭇가지에 노란 나뭇잎 몇 개만 애처롭게 매달려 있었다. 이제 가을도 다 끝나가는가봐, 의미 없는 말을 입 안에 굴리며 가만히 창밖을 응시하던 그녀가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아 티 테이블을 두드렸다. 어느새 들어온 다른 하녀가 걸리적거리지 않을 정도의 움직임으로 침구를 정리하고 있는 걸 발견한 그녀가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리고 손등으로 턱을 괴었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이 일을 할 때는 적당히 비켜주는 편이 좋겠지만 저는 딱히 그러지 않아도 아랫사람들에게 두려움을 갖고 피할 존재는 아니었다. 귀족인지라 평민들인 그네들이 예의를 갖춰 조심스럽기는 했지만 단지 그뿐, 갑작스레 빈자리에 들어앉은 힘이라고는 없는 어린 후작부인이 이곳에서 오래 일한 사용인들에게 무섭기나 할까. 지금도 굳이 제가 이 방안에 있는데 여기를 정리하기 시작한 것부터가 그러했다. 나가라는 무언의 뜻이겠지. 왕궁과 그 내부 인맥을 끌어 모은다면 집안에서의 권력을 어느 정도 휘어잡는 것은 문제도 아니겠지만 이곳에 제가 들어앉아 있는 건 밀약의 대가일 뿐, 굳이 아무것도 해야 할 필요가 없었는데다 이미 장성해 저와 나이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 소후작과 충돌하고 싶지 않았기에 필요하다 싶은 연회에 후작부인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하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활동도 하지 않은 채 칩거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녀가 이불을 세게 털자 방 안에 미묘하게 먼지가 날렸다. 여기서 있어봤자 먼지만 먹겠네, 한숨을 내쉰 그녀가 일어나 방의 문고리를 잡았다. 응접실에 갈까 아니면 서재? 어디를 갈지 고민하던 그녀의 뒤에서 이불을 정리하던 하녀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마님, 침대 위에 있는 꽃은 마님께서 두신건가요?"

 "꽃?"

 

 꽃이라니. 이 방에는 꽃병을 둔 적도 없었다. 딱히 제가 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어서 밖에서 사온 적도, 정원에서 꺾어 들여온 적도 없었고 누군가에게 선물 받는 일은 더더욱 없었기에 꽃이 이 방에서 나온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하녀가 들고 있던 꽃을 빼앗아든 그녀가 문을 열고 방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에게 물었다.

 

 "내가 자는 사이에 누가 이 방에 들어왔나?"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만, 혹 무슨 문제가 있으십니까?"

 "…아니. 그냥 잠결에 인기척을 느꼈던 거 같아서. "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잠귀가 그렇게 밝은 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분명히 자기 전까지 없던 새하얀 꽃이 있다는 건 누군가가 방 안에 들어와 이걸 가져다 뒀다는 뜻이었기에 그녀는 꽃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누가 그랬을까, 아무리 머릿속을 뒤엎어 봐도 제게 이러한 정성을 행동으로 보여줄 사람이 없었다. 후작이 제게 이런 꽃을? 결혼 초기에는 놀리는 것인지 제 머리색과 비슷한 보랏빛 꽃들을 몇 번 꽃다발로 해 온 적이 있었으나 외부에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 그럴 필요가 없어진 후에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는 아니야. 최근 1년을 넘어 그 이전까지의 기억을 천천히 훑어가던 그녀가 문득, 지금 이 꽃과 똑같은 걸 봤던 때를 떠올리고는 몸을 떨었다. 설마…

 

 

 평소라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할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창가 근처에 있는 티 테이블 위에 두 사람분의 티세트를 준비해두고는 적당한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있었다. 하녀에게 말해 두 사람분의 찻잔을 준비한 그녀가 달이 정 중앙의 하늘에서 조금 더 기우는 때가 되자 맞은 편 빈자리에 찻잔을 하나 더 꺼내 올려뒀다. 커튼을 활짝 열어 밤하늘을 슬쩍 올려보고는 창문을 살짝 열어 그 사이로 바람을 맞이했다. 밤공기는 아침보다 더 차가웠지만 적어도 제가 아직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성의를 보이기 위해서는 창문을 열어두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 그녀는 그냥 그 추위를 잠시 견디기로 했다. 수집용으로 모아둔 차 중에서 그나마 단맛이 조금 묻어나는 찻잎을 골라 찻주전자에 집어넣고는, 미리 준비시킨 터라 조금은 식어버린 물을 천천히 부었다. 원래라면 상대가 가장 좋아하는 차를 탔겠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났다고 그녀가 더 이상 어떤 차를 즐겼는지에 대한 기억도 남아있지 않았기에 결국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그나마 상대에게 어울릴법한 차를 고르고 골라 꺼내든 것이었다. 차가 우러나며 수색이 다홍빛을 띄는 것을 보던 그녀가 아까 티세트와 함께 들고 오게 시킨 꽃병을 맞은 편 빈 찻잔 옆에 올려놨다. 꽃병 안에는 아까 아침에 그녀의 침대에서 발견한 새하얀 꽃이 꽂혀있었다.

 

 “이 꽃, 네가 뒀지?”

 

 찻주전자를 들어 올려 맞은편의 빈 찻잔에 따르면서 필레리에 후작부인, 다이앤타 메그레즈 필레리에가 한숨을 내쉬듯 허공을 응시하며 말을 건넸다. 당연하게도 상대가 앞에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꽃을 두고 간 그녀와 저와의 관계는 생과 사만큼 깊고 멀어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불가능했기에. 그렇지만 다이앤타는 이 꽃을 보낸 것이 아우렐리아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몇 년 전 아직 에크베르트의 성을 지닌 채 벨베데레에 참가하고 있던 시절에도 그녀에게 똑같은 꽃을 받은 적이 있었으니까.

 아우렐리아 이안느 라 비제노르, 낮의 색채가 지독히도 어울리지만 햇볕이 겨울의 추위를 녹이기도 전에 그대로 스러져버린 사람. 어느 정도의 교류가 있었지만 각자 지지하는 후계자가 달랐기에 동료는 아니었고 그렇다고 친우라고 부르기에는 그만큼 서로 가깝지는 않은 애매한 사이였던, 제가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녀. 몇 년 전 그 꽃을 제 집무실에서 봤을 때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녀가 다녀간 것이라고. 새하얀 꽃이 마치 아우렐리아 본인과 닮은 까닭에 한참을 멍하니 바라봤었다. 자신과 닮은 꽃을 고른 건지 아니면 별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그 때에도 알지 못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녀와 저 사이에는 절대 어그러지지 않을 경계가 있었으니까. 그러니 홀로 그녀의 장례식을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하고 있는 이 행동도 결국 스스로를 달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럼에도.

 

 “네가 여기 와 준 이유를 모르겠어. 그런데, 기쁘더라.”

 

 그 사소한 꽃 하나가, 숨만 쉬며 살던 단조로운 일상에 잠시나마 옛 추억을 불러올 수 있어서 기뻤다. 그 때 그렇게 잔잔하게만 흘러갔던 시간이 너와 나 사이에는 충분히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뜻 같아서. 적어도 찾아올 사이는 된다는 뜻이잖아. 다이앤타가 다시 한 번 꽃잎을 살짝 건드리고는 맞은편에 앉아 조금은 식어버린, 자신 몫으로 따라놓은 찻잔을 들어 올려 입을 댔다. 차분하던 그녀와 닮은, 약간은 씁쓸한 첫 맛과 끝을 감싸는 부드러운 맛. 밋밋한 스콘과 어울릴 법한 차는 달이 기우는 시간에 먹어도 크게 문제가 없을 것 같은 맛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스콘은 준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티타임을 보내고 있는 것 마냥 즐거웠다. 이런 기분을 느껴보는 게 얼마만이지. 제 역할은 끝났으니까 그냥 아무렇게나 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감정에 충실하고 하고 싶은 걸 하며 살 수 있는 사람. 한순간에 편해진 마음에 들고 있던 찻잔에 힘이 빠졌다. 두껍게 깔린 카펫 위로 잔이 낙하하며 비싸 보이는 카펫에 얼룩이 묻었지만 정작 본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팔을 턱에 괴었다. 당연하게도 줄지 않는 맞은편의 찻잔의 끝을 손가락을 뻗어 느릿하게 쓸은 다이앤타가 목이 잠긴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앞으로 이렇게 살아도, 너는 원망하지 않을까?”

 

 원망하지 않는다는, 대답이 바람을 타고 들리는 것 같아 창밖에 시선을 돌렸다. 이건 진짜 너의 대답일까. 아니면 이기적인 나의 기원일까. 다시 한 번 듣고 싶어서 호흡마저 최대한 억눌러 봐도 귀에 들리는 것은 창문 틈새로 불어오는 바람에 커튼 끝자락이 흔들려 나는 소리뿐이었다. 다시 숨을 길게 내쉬고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가 아까 떨어뜨렸던 찻잔을 집어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하고 싶은 일이 굉장히, 많이 생각났다. 일단은 궁에 가보고 싶었다. 소식은 듣고 있었지만 입궁은 가능하면 하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니 제가 칩거를 하든, 궁을 가든 당장 왕께 무슨 문제가 생길 것 같진 않았다. 계절 아래의 월의 칭호까지 받았던 왕녀의 서기관장이 결혼 후에 관직에서 내려왔다가 간만에 옛 동료들을 보러 궁에 가는 게 뭐가 이상할까. 그러니, 가 보자. 옛날을 떠올리며 사람들과 인사를 해 보자. 그리고 조금씩 일어나보자. 다이앤타가 의자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일 나가려면 남편의 허락을 미리 받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시간이 늦었지만, 그건 제가 굳이 신경 써줄 필요는 없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방은 열어둔 창문 사이로 불어온 옅은 금빛 바람에 커튼 끝자락이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잠깐이지만, 그 바람이 뭉쳐 사람의 형상을 보인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바람은 자의가 있는 것처럼 곧게 불어와 다이앤타의 맞은편에 있던 차에 물결을 일으켰다.

 

 

 안온한 새벽을 보내요. 내 친구.

 

 색깔의 바람이 돌아간 자리엔 달빛이 내리고 자연의 소리만 언뜻 창을 때리는 고요하고 고요한, 그저 오래도록 조용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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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합작은 에본(@Ebon_nim)의 2차 지인제 글 합작입니다. 일체의 무단 전재 및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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