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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回歸)

w. 후퇴사격

 영의 밤은 언제나 어둠이었다. 소중한 사람들이, 무고한 이들이 휘말리는 것을 두려워해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헤맸다. 자신을 쫓는 이들과 쉴 새 없이 싸우며 쪽잠으로 몇 년을 지내며 소년이었던 그는 점차 피폐해져 갔다. 모든 것이 끝나 일상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을 때도 그는 어렵게 얻은 이것들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자그마치 15년, 그동안 고통 받으면서 원해온 것을 손에 넣었음에도 그는 편해질 수 없었다.

 

 머리카락과도 같은 색의 다크서클이 눈 밑을 침범했다. 예전과 다를 것이 뭔지. 영은 중얼거리며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다. 고층 건물에 위치해 도심의 야경이 보이는 그의 방은 침대와 책상, 옷장을 제외한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아 생활감이 없어 서늘하게 느껴졌다. 공백을 감싼 어둠은 영의 목을 졸라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란스러운 밤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영은 끝내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이불을 뒤집어썼다. 발걸음 소리, 그 흔하디흔한 가전제품 소리조차 나지 않는 이곳은 영에게 새로운 지옥과 같았다. 더군다나 소중했던 이의 목숨으로 이룬 지옥이니 더욱 고통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 전투 이후, 소년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영과 소년들을 괴롭히던 만악의 근원과 함께 세상에서 사라진 듯, 전장에 남겨진 것은 치열했을 전투의 흔적 그뿐이었다. 수소문해보아도 찾을 수 없었고, 모두가 죽지 않았다고, 완벽한 승리라고 자신했을 때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이들은 절망에 빠졌다. 가장 큰 절망에 빠진 것은 영이었고, 현재까지도 헤어나오지 못했다. 날이면 날마다, 아직 현장이 보존된 전장에 그는 나아갔다. 혹시라도 다시 찾아올 동생을 위해서. 끝없이 기다렸던, 그 때의 그와 똑같이.

 

 "형은 카일이 죽었다고 생각해?"

 

 다른 의동생의 목소리가 영의 귀를 간질였다. 묵묵하게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매만지던 교복을 입은 청년이 아무도 없는 허공에 조각을 내던졌다. 사막보다 메마른 감정이 드러난 그의 표정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결여되기라도 한 듯, 다른 이들이 보면 어딘가 무섭다고 할 수준의 것이었다. 청년의 물음에 영은 망설였다. 죽음을 부정한다 해서 그가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일주일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 굳건히 버텨온 영조차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영은 끝내 동생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고, 시간은 천천히 흘러 밤이 찾아왔다. 불조차 없는 폐허는 흡사 전쟁에서 죽은 이들의 원혼이 나와 영의 목을 조르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오싹했다. 악몽은 다시 영을 감싸 올랐다. 끝없는 악몽은 그를 갈구하고, 수많은 잡음이 그의 정신을 압도했다. 모두를 지키기 위해 행한 행동은 결국 소중한 이의 죽음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태 영, 한때는 본명을 잊고 제오, 아모스 등으로 불렸던 청년은 자신의 행복, 안정된 일상을 바라지 않았다. 동생들이 조금 더 안전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의 삶의 이유이자 목표였다. 그리고 그들이 혼자 싸우지 말라고 손을 내밀어 주었을 때,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 과거에 사로잡힌 나머지 사지로 들어오는 이를 환영할 리가 없었다.

 

 혼자 싸운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요

 싸우는 거 아니야, 버티는 거지.

 그렇게 버티다가 무너지면, 우리가 좋아할 거 같죠?

 자신보다 여섯 살은 어렸을 동생에게 꾸지람을 듣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영 자신도 알고 있던 부분이다. 실험을 통해, 능력을 통해 강해지긴 했지만, 무적은 아니었기에. 언젠가는 반드시 쓰러질 것이기에. 그런데도 어리석게 고집을 피우며 그들의 손을 잡지 않고 그들이 찾을 수 없는 머나먼 곳으로 떠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하면 동생들 역시 마음을 돌리리라고. 가장 잘 아는 이들이니까 그렇게 행동을 개시하기로 마음을 먹고 실행에 옮기려는 순간 그는 처음으로 벌어진 전쟁을 마주했다.

 

 그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과거와 마주하고, 자신들의 죄악, 원망과 마주했다. 피해가 적진 않았지만 거대한 세력 앞에서, 한때 공포감에 사로잡혀 굴복했던 이들에게 대적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들은 기뻐했다. 영은 그것을 보며 생각을 이어갔다. 과거에 얽매인 사람은 저들이 아닌 자신이라고.

 

 형은 언제나 혼자 생각했죠.

 나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그때는 그랬겠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보면 알잖아요.

 

 어린 동생의 당돌함에 영은 입을 닫았다. 그들이 보여준 것은 영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자신의 친가족과 마주하고, 진실을 들었던 영은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 후, 여러 차례 작은 전투와 커다란 전쟁을 걸친 그들은 마지막을 향해 나아갔다.

 

 해결할 사람이 나 뿐이라는 건 형도 알 테죠.

 과거에 사로잡히지 마요, 형.

 난 죽으러 가는 게 아니에요. 나의, 형의, 우리의 지독한 악몽을 끝내러 가는 거죠.

 

 환하게 웃으며 마지막을 향해 떠나가던 동생의 미소가 영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메마른 줄로만 알았던 그의 눈물샘에서 쓰라린 무엇인가가 흘러내렸다. 작게, 여러 번, 그리운 이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보았지만 들려오는 것은 시끄러운 침묵이었다. 카일, 네가 틀렸어. 내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태어나고 나서 얼마 만에 흘리는 눈물이던가. 영은 흘러내리는 것을 참아내지 않았다. 남들에게 들었듯, 더는 참을 필요가 없었다. 슬프면 울고, 화나면 화내고, 기쁘면 웃고. 아직은 어려운 것들을 하나하나 배워가는 과정이었다.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 그것은 영의 아버지가 그에게 직접 조언한 것이었다. 뜨겁게 흘러내리는 것이 마음을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과거에 느낀 통증과는 다른, 하지만 훨씬 더 아픈 고통이 그의 심장을 쥐어왔다. 숨통이 막혔지만, 고문을 당할 때보다 더욱 고통스러웠다. 영은 그렇게 마지막 흔적이 깃든 장소에서 홀로 고통받았다.

 

이 모든 게 끝나면 같이 별이라도 보러 가봐요. 그때 못 지킨 약속, 이번에는 지키라고요.

 

 문득, 소년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실험소에서 했던 약속과 마지막 전장으로 가기 전에 했던 약속. 모두 지키지 못했다. 지켜지지 못했다. 그저 빈말로 했던 약속은 언젠가 반드시 그러고 싶다는 소원이 되었고, 지금은 그저 후회되었다. 그에게 있어 밤하늘이란 혼란 그 자체일 뿐이었다. 이제는 곡소리조차 참아내지 않은 그는 십여 년 간 쌓여온 절규를 토해냈다. 지킨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소년의 미소를 처음 보았을 때가 떠올랐다. 지독한 감옥에서 처음 눈을 뜬 소년은 잔뜩 겁을 먹었지만, 특유의 붉은 눈동자는 루비와 핏빛, 그 중간에 위치해 투명하게 빛났다. 실험소 위에서 펼쳐지는 투기장의 변태들이 보면 참으로 좋아할 눈이구나. 처음에는 그리 생각하며 아이에게 다른 아이들과 비슷한 친절을 베풀었다. 그저 말뿐인, 현재 상황을 나아지게 할 만한 말도 아니었지만, 소년은 그에게 웃어 보였다. 영은 그 미소를 본 순간 소년을 지켜야겠다고 다짐했다.

 

 소년의 눈이 뽑힌 날이 떠올랐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실험대로 끌려간 소년은 혈액형조차 맞지 않는, 다른 능력자의 혈액을 강제로 수혈받아야 했다. 한쪽에는 폐기물들을 모아두는 장소가 있었고, 소년은 고통과 함께 두려운 눈으로 그곳을 응시하며 침묵했다. 그가 감옥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오른쪽 눈은 더는 붉은빛이 감돌지 않았다. 피가 흘러내리는 그의 오른쪽 눈은 자수정과 바이올렛, 그 중간의 색이 되었다. 그런데도 미소는 떠나지 않았다.

 

 영은 궁금해했다. 어떻게 너는 웃을 수가 있을까, 거짓된 미소가 아닌 진실된 미소임을 그는 알았다. 눈치로 이 실험실에서 컸기에, 그 정도는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소년이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의구심이 풀리기도 전에, 그들은 마지막 날을 맞이해야 했다. 외부에서 온 구원. 실험을 들킨 단체는 실험소 전체를 폭파시켰다. 깊은 땅속에 모든 것을 묻어버리려고 했다. 실험체, 폐기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얀색 옷은 상복이 되기에 적절했고, 시체들은 안간힘을 써 자신들의 묫자리 바깥으로 이동했다.

 

 모두가 성공한 것은 아니었고, 그것은 영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이들을 먼저 내보내던 영은 폭발에 휩쓸려 건물과 함께 땅 밑에 묻혔다. 구사일생으로 죽지 않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 탈출할 수 있었지만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영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단체가 먼저였다. 생사를 알리기도 전에 추격당하기 시작한 영은 꼭꼭 숨어야 했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이름을 대신하기 위해 실험소에서 사용했던 이름조차 버리고, 그는 꼭꼭 숨어버렸다. 그렇게 숨어만 다녔어도, 그의 명줄은 제법 안전했을 것이었다. 살아남은 이들의 이후가 궁금해 그들을 멀리서 지켜보길 반복하며 영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일상 아닌 일상은 그저 독일 뿐이구나.

 

 그렇게 지켜보던 어느 날, 막내 동생, 그 아이가 다시 한 번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날이 다가왔다. 참아야 했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고, 동생은 그를 한 번에 알아보았다. 영은 그것을 자신의 최대 실수라고 여겼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동생은 무사했을 테니까. 지금 사라진 이가 동생이 아닌 저로 그쳤을 테니까. 자책감은 더욱 심해지고, 이명은 더욱 시끄러워지며, 밤은 더욱 혼란스러워져 갔다.

 

 멀리서 들려오는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그의 귀를 울렸다. 이명이 잠시 멎고, 새하얀 달빛이 폐허를 비추었다. 실험소 폭파사건 당시, 그들의 기분이 이랬었나. 영은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자신이 참 나쁜 새끼였구나, 하면서.

 

 "이제야 좀 알겠어요, 내 기분?"

 

 들려오는 환각은 익숙했다. 자신을 가장 괴롭게 만드는 동생의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기쁠 수밖에 없었다. 영은 시선을 돌려, 동생이 있는 곳을 찾아보았다.

 

 새하얀 머리털과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이제 막 열다섯이라는 나이에 접어든 소년은 싱긋 웃으며 영을 바라보았다. 원망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게 소년은 편안하게 웃었다. 학교를 끝마치고 돌아와 인사를 건네듯, 가볍고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너는 왜 그렇게 편안해 보이는 건데."

 "형이 드디어 내 기분을 알아줘서요."

 "너도 참 악취미다…."

 

 허탈하게 웃으며 눈을 가린 영은 다시 한번 소리 없이 눈물을 내뱉었다. 이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저렇게 웃고 있지 않을 테니까.

 

 "내가 허상이라고 생각해요? 형 마음 속의 허상?"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그러지를 못 해. 난 거짓말 못 하잖아."

 "그리고 망상도 잘하고요."

 

 피식, 웃은 소년의 목소리에 영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동생의 모습이 맞았다. 그런데도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영은 점차 이상한 것이 강해짐을 느꼈다. 커다란 달이 영의 검은 머리카락과 동생의 하얀 머리카락을 불태우고, 폐허 곳곳의 파편은 점차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밤은 사라지고, 빛이 공간을 메우기 시작했다.

 

 "꿈…이야?"

 "그거야 본인이 알지 않겠어요? 이게 꿈이라면 난 형 말대로 망상에 불과한데. 아니면 내가, 원망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건가요?"

 

 똑같이 웃으면서 뜬 눈동자가 이질적이었다. 영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소년을 주먹으로 쳐냈다. 마치 물을 쳐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동생의 허상은 서서히 미소를 지었다. 공간이 밝아지고, 감은 눈을 뚫을 정도로 강한 빛이 쏘여지면서 다시 한 번 어둠이 찾아왔다.

 

 영은 눈을 떠보았다. 시큼한 가습기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어두운 병실 한 쪽에 전등이 켜져 있었고, 소년으로 추정되는 그림자가 든 책에서는 기분 좋은 소리가 흘러내렸다.

 

 "아직 밤인데 더 자요."

 

 아, 익숙한 목소리다. 너무나도 익숙해서 서글픈 목소리였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커튼 하나를 걷은 영은 그제야 웃어 보였다. 자신과 똑같은 환자복을 입은 동생이 여유롭게 책을 읽다가 자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너… 어떻게?"

 "어떻게는 무슨 어떻게에요, 나 대신 죽을 뻔 해놓고 지금 내가 살아있냐고 묻는 거예요? 자기가 살아있는 거냐고 묻는 게 아니라? 차라리 여기가 천국으로 가는 나들목이냐고 물어보지 그래요?"

 

 어이없다는 듯 내뱉는 소년의 말에 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과 미소를 동시에 지었다. 전신이 나른해지는 기분이 예전과는 다르게 영 나쁘지 않은 것이었다. 일상, 아무도 죽지 않은. 흘린 피를 무시할 순 없더라도 점차 나아질 수 있을, 진짜 일상을 그는 되찾았다. 곧이어 램프를 끈 소년이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천장을 바라보았다.

 

 "꿈을 참 오래도 꾸네요, 형은."

 "편하게 자본 게 오랜만이라서 그래."

 "그게 얼마 만인데요?"

 

 동생의 말에 영은 입을 다물었다. 기억이 나기도 전이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침묵을 이해한 동생은 그저 비슷하게 침묵을 유지했고, 서서히 입을 열었다.

 

 "이제는 다 끝났으니까 과거에 속박되지 마요. 진짜로, 모두 다 끝났으니까."

 

 동생의 말에 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서서히 눈을 감으며 어렵사리 얻은 고요한 밤을 즐기기로 했다. 소년의 숨소리가 점차 작아지고, 영의 숨소리 역시 점차 작아졌다. 그렇게 밤은 찾아왔다. 악몽이 아닌,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밤, 그저 오래도록 조용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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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합작은 에본(@Ebon_nim)의 2차 지인제 글 합작입니다. 일체의 무단 전재 및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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