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하회상록(月下回想錄)
w. 익명B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말하자면,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평범한 고등학교를 나와, 평범하게 대학을 다녔다. 굳이 특이한 점이 있다면, 사실 그다지 특별한 것도 아니지만, 모든 사랑이 짝사랑으로 끝났다는 것 정도일 테다. 추석의 보름달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에 장난스럽게 ‘애인 생기게 해주세요’ 하고 비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란 것이다. 그런 내가 그녀를 만나게 된 건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우연히 같은 취미를 가졌고, 우연히 아는 사람이 같았으며,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을 뿐이다. 우연이 두 번이면 인연이고, 세 번이면 운명이라는 소리를 믿지는 않았으나, 나는 우리 사이에 ‘특별한 무언가’ 가 있기를 바랐다. 나와 그녀는 나이차이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두 살. 이미 사회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을 때 만났더라면 조금 달랐을까? 그러나 우리가 만났던 나이는 20대 초반이었다. 한창 젊고 어릴 나이에 찾아온 때 아닌 사랑은 모든 걸 활활 태우기 시작했다. 마음도, 몸도, 미래도.
우리는 꽤 오래 만났다. 연인으로서 할 만한 것들은 어지간해선 다 해봤고, 갈 만한 곳들은 다 가봤고, 심지어는 꽤 짧지 않은 시간을 같이 살기도 해봤다. 함께 침대에 누워서 뒹굴거리는 시간에 종종 나오곤 했던 주제는 권태기와 이별에 대한 내용이었다. 사랑은 영원할 수 있는가, 그 주제로 우리는 오래 얘기해왔다. 그러고 결말은 언제나 ‘우리는 다를 거야’ 같은 근거 없는 희망이었다. 희망은 기대를 만들고, 기대는 실망을 만든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마음도 언젠가는 변하기 마련이다. 영원한 사랑 따위는 세상에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다른 연인들과 다르지 않게 평범하게 이별을 맞이했다는 뜻이다. 변화의 시작은 나였다.
그녀는 매 순간 특별하길 원했다. 만난 지 수년이 되었어도, 처음의 그 마음이 그대로이길 바랐다. 물론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처음의 설렘은 곧 익숙함으로 이어졌다. 나는 그런 특별함에 지쳐가고 있는 중이었다. 모든 것이 특별할 수는 없었다. 늘 새로울 수는 없는 법이었다. 우리는 어렸고, 선택의 제한이 있었고, 그 선택의 폭 안에서 결정을 해야 했기에 단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다르게 나는 어쩔 수 없지, 하고 타협해버리는 인간이었다. 변함이 없는 단조로운 일상은 대화의 단절을 만들어냈고, 나는 말재주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같은 공간을 향유하면서도 지독한 침묵에 그저 서로 휴대폰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나는 이미 그 순간부터 이별을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눈을 멀게 했던 사랑은 조금씩 거두어지고, 나를 일어서게 만들었던 그녀의 모든 것들이 도리어 무겁다고 느껴버렸던 그 때에. 침묵이 무엇보다 무거웠던 그 순간에.
짧지만은 않은 연애 이야기를 들은 나의 몇 안 되는 지인들은 그 모든 게 결국 권태기라 평하곤 했다. 변화가 없는 건 자연스럽게 권태로 이어진다고. 헤어진 지 몇 년은 지난 지금에서야 그러려니 싶을 뿐이다. 함부로 영원을 말해서는 안 됐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리도 쉽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뭐, 거창하게 말하곤 하지만 결국은 사랑 또한 유한하다는 당연한 명제를 뒤늦게야 알았을 뿐이다.
이별은 간단했다. 헤어지자는 말과 알았다는 대답이 전부였다. 나는 내 생각보다 더 무덤덤한 기분이었고 자기 자신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는 기분은 꽤 생소했다. 어쨌든, 눈물 한 방울 없는 건조한 마음은 우리가 여기서 헤어지는 게 옳다는 걸 상기시켜줄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에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 며칠은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그 즈음 우리는 더 이상 같이 살고 있지 않았기에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며 마음이 멀어질수록 연락도 뜸해졌으니, 더 이상 오지 않을 연락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어딘가 마음 한 구석에선 후련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구속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돌이켜보면 나쁜 연애는 아니었다. 우린 꽃 같은 나이에 만나 불꽃같은 사랑을 했으니까. 그 시절의 우리는 무엇보다 불타올랐고, 밝게 빛났다.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했고, 미래를 이야기 할 때면 그 상상 속에는 반드시 서로가 함께였다. 마당이 있는 집을 사고, 개와 고양이를 기르고, 식사 후엔 산책을 나가고,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얼굴이 서로인 삶을 꿈꾸었다. 어쩌면 그랬기에 우리의 모습에서 ‘예전 같지 않음’을 발견하고 괴로워했을 테다.
‘달이 아름답네요.’
일본의 소설가 나츠메 소세키가 ‘I love you’ 를 달이 아름답다는 문구로 번역해 고백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된 건 꽤 유명한 일화이다. 우리는 그 문구를 꽤 즐겨 사용했고, 보름달이 높이 떠 비출 때나 초승달이 서쪽 하늘 언저리에 걸릴 때면 서로 달이 아름답네요, 하며 농담처럼 주고받는 게 일상이었다. 달을 가리키며 웃는 그녀의 모습은 꽤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았는지, 지금처럼 달이 밝게 뜬 날이면 종종 그녀가 떠오르곤 했다. 그러니까, 몇 년이나 지난 지금에서도 그녀는 송곳처럼 불쑥 튀어나와 나를 찌르고는 했다. 이 짧은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그렇다. 문득 올려다본 달이 너무나 아름다워, 한 때를 불태웠던 사랑과 이별에 대해 누군가에게 사소하게나마 이야기 해보고 싶었다. 오늘도, 그래. 그저 오래도록 조용한 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