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고록
w. 경구
“ 이제 더 이상 주문을 받지 않을 거라... ”
걸음을 바삐 움직이다보니, 바닥에서 이는 흰 가루에 소매로 입과 코를 가렸다. 창을 열자 밖으로 빠져나가는 석고와 먼지가루에 기침을 두어 번 뱉고는 다시금 전화를 귀에 댄다. 예, 예. 이 전에 주문 건들은 이미 완성했어요.. 흰 천을 거둬내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각기 다른 크기의 얼굴모형 석고상. 납품해야할 목록을 되짚으며 전화를 끊고는 가장 작은 머리를 들었다. 이건 다시 봐도 마음에 안 드는데, 새로 만드는 게 좋겠다. 흰 천을 도로 덮어놓고, 창까지 닫고 나서야 창고를 나오고 보니 벌써 해가 중천이라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손에 들렸던 석상은 탁자위에 대충 얹어놨다. 이번 주문을 끝으로 슬슬 자리를 옮길 때가 되었으니까. 늦지 않게 준비해야지. 세상에서 잊혀지는 건, 몇 번을 반복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백사도는, 나는 죽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긴 생. 유명 조각가. 유서도 어떠한 징조도 없이 사라지는 한 사람. 세간에서는 미스테리한 사건으로 떠들썩해도 나에게 있어 잠시의 시간이면 잊혀지기 마련이었다. 그 동안 세상이 여러 번 뒤집혔으니. 내가 사라질 즈음이면 새로운 세상의 서막을 준비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삶이 무료하지는 않는가 스스로에게 되물으면, 그저 온온한 웃음이 지어졌다. 나는 이 완벽하지 않은 불멸의 삶이 만족스러웠다.
삶이 쌓이고, 쌓여 한 곳에 정착하고 싶을 법한데도 나는 오래 머무는 법을 모르는 것처럼 떠돌아다니는 것을 즐겼다. 옛말로 역마가 끼었다고 하던가? 정과 석고, 영감으로 빚어내는 것들을 사랑하니. 사람과의 관계는 그리 중요한 것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한 순간이야. 정확히는 죽지 않는다. 보다, 늙지 않는 것이라. 20대중후반 정도의 청년 같은 외양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사람과의 관계를 늘려봤자 세상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데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간혹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노인들의 인생을 듣는 건 꽤 좋아했지만. 그 외에는 … 애초에 이 반쪽짜리 불멸의 삶을 살기 이전에도 외로움 같은 건 잘 타지도 않았다. 꼭 사람이 곁에 있어야만 하는가?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삶은 도리어 제게 평화였다. 흔들리지 않는 수면.
처음엔 저 자신과 같은 동류가 있지 않을까. 한 때는 찾아나선 적이 있었다.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그에 대한 자료를 찾고 수소문도 해보고, 여러 방면으로 시도해봤지만 어떤 미친 이가 당신은 불멸을 사느냐고 묻겠는가. 사이비 의심은 양호한 편일 테니까. 실마리를 얻을 즈음엔 저는 이미 세상에 있어선 안 되는 사람이 되었던지라 번번이 아쉬움만 가진 채 놓아야만 했었다. 그러다 아예 손을 놓아버린 건 언제였지... 이마저도 가물거릴 정도로 꽤 오래된 얘기가 되어버렸다. 결정적으로 놓게 된 계기는 찾지 못할 거라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 아닌. 이리 찾지 않아도… 눈만 마주쳐도 저와 동류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어서 붙잡으려던 손이 황망하게 허공에 떠있던 것을 기억한다. 조금만 일찍 손을 뻗었다면 잡았을지도 모르는데. 어깨까지 내려오지도 않는 단발머리, 눈동자와 안경. 희고, 흰 손. 아쉬움보다는 설렘이 먼저였다. 저와 같은 부류거나, 완벽한 불멸의 삶을 사는 이라면 굳이 그 때가 아니어도 꼭 만나게 될 거라는 감각이 손을 저릿하게 만들었으니까. 그 때문이었다. 찾는 걸 포기한 건.
이번 세상에서도 만나지 못했지만, 그 잠시의 마주침은 제게 영감이 되곤 했다. 특히 그 손이. 햇빛에 반짝이는 것 같기도 했고, 움직일 때마다 마디의 굴곡이 아름다웠다. 순간 저도 모르게 변태인가? 자괴감이 들어 머리를 흔들기도 했으나 별안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제 손이 만들어내는 것에 흔히들 말하는 뮤즈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른 이들의 손을 보면 별 생각이 없었는데, 꼭 그 사람만 그랬어. 같거나 비슷한 이들끼리의 연결고리일지도 몰라. 생각이 멈추고 나면 어느새 완성되어있는 석고상에 그리 생각했다. 해가 저물어 하늘을 물드는 색이 주홍빛과 황금빛이 아닌, 분홍빛과 자줏빛에 창문을 닫았다. 근래 들어 새 세상을 맞이하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것 같아 미묘한 기분으로 침대에 누워 두 손을 가지런히 배 위에 올렸다. 한숨 자고나면, 이 세상은 바뀌어있을 것이다. 바로 전의 세상은 무엇이었더라... 한 19세기 즈음으로 보이는 영국이었던가. 번번이 바뀌는 것이 있어도 제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름도 얼굴로 원래 있었던 사람처럼 되어있었고, 언어 소통마저도 무리 없이 이어졌으니. 그저 전쟁통만 아니길 바랄 뿐이었지.
눈을 뜨면 천장이 바뀌어있었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걸 알리기라도 하듯, 창문으로부터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것이 아침은 진작 지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천천히 몸을 일으키다 저도 모르게 몸이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저만 있어야할 집 안에,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음식 냄새와 발소리. 강도나 무어라하기엔 몸이 굳은 것치고는 마음이 편해서… 느릿하게 발을 옮기자 주방에서 나오는 이는, 다름 아닌.
‘ 잘 잤어요? 오늘따라 늦게 일어났네요. ’
오늘은 제가 아침을 준비해봤어요. 뭐해요? 할 말 있나요?
단발머리, 눈동자와 안경, 희고... 흰. 제 동공이 떨리는 게 느껴지고, 손을 뻗으면 순간적으로 눈앞이 이지러지는 현기증에 비틀거리며 머리를 짚었다. 이 사람이 왜. 내 집에 있는 거지? 의문을 갖는 순간 창밖으로부터 어둠이 들이닥치고 그 사람과 저를 쓸어버렸다.
무슨 꿈을 그런 걸 꾸는 거야.
한 책방의 구석진 코너 벽장에 기대 머리를 퉁, 부딪혔다. 꿈을 꾸는 게 처음은 아니었으나 이런 건, 처음이었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가? 그랬던 거 같기도… 침음이 흐르자 주변에 있던 작은 아이가 제 부모로 보이는 이에게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네가 보기에도 이상하지? 나도 이상하다. 벽장에서 떨어져 가볍게 고개를 저어내고는 마저 책을 찾으려 눈을 굴렸다. 새로운 세상은 제가 처음 온전치 못한 불멸을 깨달은 세상과 같았다. 말하는 것도, 도시도, 외양도 모두. 집의 위치만 달라졌다 뿐이라 꿈으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서둘러 제가 기억하던 책방으로 향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꼭 와야할 것만 같았어서 거의 본능적으로 발이 이곳에 닿게 한 것이었다. 신기한 일이야. 이런 책방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도. 조금 낡아보였으나 어지간히 찾는 건 전부 있을 것 같은 책방이었다. 중고로 보이는 책들이 모여 있는 것과, 서점 안으로 들어오는 빛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그런 곳. 책방에 들어설 때부터 미묘한 감정이 이는 것을 느꼈으나 명확한 사유는 찾지 못한 채. 눈에 띄는 소설 하나를 사, 집으로 돌아왔다.
시작이 어쨌던 간에, 새로운 세상은 이 전에 기억하던 것과 달라진 것이 없어 평소보다 빠르게 적응해갔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비단 책방뿐만 아니라, 저를 기억하는 이가 있어 놀라기도 했고… 이건 마치 완전하지 않은 불멸의 삶을 시작하기 전과 같았다. 조금 향수에 젖어갈 법했지만 도리어 저는 불안을 느꼈다. 이게 불멸의 끝이라면. 여지껏 보았던 것들이 전부 꿈이었고, 이게 현실이라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런 불안감과 처음부터 알고 있던 세상의 안정감이 저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주기가 정해져있는 걸까? 내가 갈 세상이 정해져있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답지 않게 생각에 빠져 멍을 때리다 그만 제 새끼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검붉은 액체가 손끝을 타고 흘러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쉬는 게 좋겠다.
평소와 같았으면 가장 먼저 재료를 찾으러 돌아다니기도 하고,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는 것에 빠져있었을 텐데,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이제는 몇 번째인지 기억도 못할 정도로 세상이 바뀌어서, 제가 지친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정도는 별 것 아니라 넘길 수 있을 텐데 멍을 때리다 손을 다칠 정도로 여유가 없어졌으니까. 집에만 있으면 생각에 빠져들게 분명해, 선선한 날씨에 맞는 코트와 지갑 그리고 열쇠를 챙기고선 정처 없이 밖을 배회했다. 집 근방에 있는 시장에 들러보기도 하고, 공원 벤치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무료했다. 처음으로 느끼는 무료함이 두려워 하늘이 자줏빛으로 바뀌길 얼마나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이번 세상은 빨리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제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눈을 떠도 여전히 붉은 노을이 보여서. 허탈한 발걸음이 집으로 향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무력해있을 수는 없는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제 걱정이 부질없었다는 것을 느꼈다.
한동안은 불규칙적인 생활이 이어졌다. 새벽이 다되어서 잠에 들고, 해가 중천을 지나 저물어갈 즈음에야 눈을 떴다. 저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생활패턴이었으나, 스스로가 그러고 있으니 점점 제 자신을 놓아가고 있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고작 이 정도로 이렇게 영향을 받는 사람이 아닌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걸까?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딱지가 앉은 새끼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오늘은 첫 날 찾아갔던 책방으로 향했다. 이미 해가 저물어 문 닫을 때가 되었지 않았을까 싶었다만, 다행히 문을 닫지 않았다. 이곳이 가장 먼저 생각났으니까. 그리고, 여기 있다 보면 마음이 편해져서 … 작게 한숨을 내쉬며 처음 책을 골랐던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책방 특유의 냄새. 사람들의 말소리,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마음을 추스르기엔 좋은 환경이라 생각하며 얼마나 서 있었는지 직원의 곧 마감이라는 소리에 그제야 느지막히 책방을 빠져나왔으나 도로 들어가야 했다. 순간적으로 허한 느낌에 제 목 주변을 만져보니, 하고나왔던 볼로타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며 제가 서 있던 책장으로 가자마자 …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단발머리, 눈동자와 안경 그리고… 흰 손에서 책이 떨어져 내렸다.
손끝에서부터 서서히 올라가는 시선이 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시선이 올라갈 때마다 머리로 스며들어오는 기억이 있어서. 나는, 불멸의 삶을 살기 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어.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일거야. 손끝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팔선을 따라 어깨를 타고 올라간다. 안경테마저도 제가 기억하던 것. 마지막으로 맞닿는 눈동자가. 너를 담은 두 눈이 환하게 휘었다.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이 세상이 너와 나를 만나게 해주려고 그랬던 걸까? 떨어진 책을 줍지도 못하고 저와 마주보고 있던 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 ...라헬아. ”
입술이 열리고, 당연하게도 네 이름을 읊는 것에 망설임은 없었다. 찰나에 느꼈던 동질의 감각. 나와 같거나 비슷할 사람. 네 뒤로 붉었던 하늘이 점점 검어지는 것이 보였다. 라헬아. 다시 한 번 네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면 서서히 몸을 일으켜 저를 바라보는 것이, 꼭 믿을 수 없다는 눈이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미 까마득해져버린 먼 세상에서 만났던 나의 … 뮤즈. 서로 손을 맞잡고 눈을 마주했던 기억들이 점점 더 선명해져갔다. 제게 뻗어지는 손을 보고 있으니, 너 또한 그런 것 같아 웃음이 점점 더 환하게 번져갔다.
“ ...어떻게?”
“ 나, 안 보고 싶었어?”
장난스레 물으며 네 손을 잡으면, 너는 언젠가 보았던 노을처럼 웃었다. 우리는 처음 만났던 곳에서 서로 같을, 어쩌면 비슷한 사람이 되어 다시금 만나게 되었다고. 할 말이 아주 많아, 너도 그렇지. 맞잡은 손의 온기가 책방에서 느꼈던 온도처럼 느껴졌다. 제 불안을 잠식시키는 따뜻한 것. 너를 꿈꿨어. 아마, 지금을 위한 거였을 지도 모르고. 아니면 … 언젠가의 기억이겠지. 이 또한 너와 얘기하다보면 알 수 있을 거야. 고개를 숙여 네 이마와 제 이마가 맞닿으면 그조차도 필요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머리로 흘러들어오는 너와 나의 기억으로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으니까. 함께 돌아가는 길은 고요했다. 네가 나오길 기다리던 것도 전과 같았고, 손을 내밀면 잡아주는 것도 전과 같아서. 누가 먼저 말할 것도 없이 함께 살았던 집으로 돌아가는, 그저 오래도록 조용한 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