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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CALL 122
나름의 정원이 꾸며져 있던 곳에는 따가운 햇빛에 물이 말라비틀어진 풀들과 잎이 말라 죽어버린 나무들이 스산함을 느끼게 했다. 이웃 주민들은 따 가운 시선으로 정원 주인의 집을 노려보았지만, 무어라 화는 내지 못하고 성질머리가 나쁜 이가 주인임을 알기에 식물들이 죄 죽은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혀를 찰 뿐이었다. 집 앞 한 쪽에 차가 들어온다. 모두가 가까이하기를 꺼리는 집에 주차할 사람이라고는 이 집의 주인뿐일 테니, 분명 차에서 내리는 이는 성질머리 고약한 그 사람이리라.
차에서 내린 아민이 현관으로 향하는 동안 바스락거리며 죽은 식물들이 아민의 발에 밟혀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오래 방치되었는지, 벌레조차 살지 않는 척박한 땅을 밟는 것이 아민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었다. 현관문 안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톡. ... 토톡. ... 토도독. 쇠 위로 무언가 닿아 떨어지는 소리에 아민은 현관문을 닫고 뒤를 돌아본다. 무언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아닌, 소리에 반응하는 버릇에 의한 행동이었다. 아민은 무엇이 소리를 내는지 찾으려 정원에 다시 발을 들였고, 소리의 주인이 아민을 먼저 찾아온다. 손등에 떨어진 빗방울은 금세 중력을 따라 사라져버린다. 조금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몸집을 불려 말라비틀어진 땅 위로 쏟아진다. 온통 빈틈투성이인 땅에 내린 비는 머물지 못하고 그대로 흘러버린다. 내리는 비를 아민이라고 피할 수는 없었다. 정장의 곳곳에 비가 닿았던 흔적이 남는다.
아민은 서둘러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마치 비가 내리는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가만히 서서 뿌리가 박힌 사람처럼 온몸으로 비를 맞았다. 아민의 꼴은 정원의 식물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세 걸음. 아민이 고작 움직인 거리였다. 세 걸음 앞에 있는 것은 빨간 우체통. 빨간색임을 알아보기도 어려울 만큼 먼지가 쌓이고, 녹이 슨 우체통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채 그곳에 버려졌다. 빗물이 우체통에 쌓인 먼지를 닦아낼수록 흠만 더욱 드러날 뿐, 이전과 같은 색을 띠지는 못했다. 마지막으로 우체통을 확인했던 때가 언제더라. 아민은 빛바랜 기억을 더듬으며 사실 하나를 기억하려 애썼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없지만, 꺼내려 하지 않던 것들은 아주 많았기에 어질러진 기억을 하나씩 확인하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비는 좀처럼 그칠 기미가 없었다. 기억을 찾는 동안 아민의 꼴은 물을 먹은 종이처럼 축 늘어졌다. 제가 그런 꼴이 되는 동안 찾아낸 기억은 아민이 외면하려던 것이었다.
"아파요."
"좋아해요."
"왔어요?"
"잘 지내요."
마지막이었다. 잘 지내라는 인사를 끝으로 우체통에 무언가 담겼던 것이. 편지와는 상관없이 아민은 평소처럼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밥을 먹고, 운동하고, 남을 괴롭히며, 불면에 시달리는 것까지. 밥은 여전히 맛이 없었고, 운동은 지루했으며, 저 자신을 괴롭히고, 이루지 못한 잠 끝에 내내 생각나던 것을 제하고. 아민은 편지에 답을 하지 않았다. 보내지 못할 이유는 없었지만,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제 곁을 떠나던 이들 중 또 하나가 떠난 것이었기에. 제 곁에 머무는 것은, 살아있는 것 중 단 하나도 없었기에. 너무도 당연한 일에 아민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민의 몸은 더는 젖을 곳이 없었다. 이미 제가 먹구름인 양 젖어 빗물을 뱉어내고 있었으니까. 아민은 우체통에 손을 뻗어 아무것도 없는 우체통을 열어본다. 아민이 문을 열자 안으로 빗물이 흘러 들어간다. 이내 검은 물이 밖으로 넘친다. 우체통을 활짝 열어둔 채, 아민은 우체통 앞을 벗어난다. 물에 젖은 식물들은 더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아민이 밟는 그대로 밟혀, 누워있을 뿐이었다. 아민은 정원을 벗어나 계속 걸었다. 마치 어디선가 아민을 이끄는 것처럼.
걸음은 앞으로 갈수록 빨라졌고, 더 가서는 뜀박질이 되어 아민의 숨을 보챘다. 차가운 빗물과 자욱이 내린 안개를 마시며 아민은 계속 뛰었다. 앞으로, 앞으로. 도망치던 그때처럼.
시린 바람이 매섭게 빗물을 몰아낸다. 빗방울은 곧장 땅에 닿지 못하고 바람에 따라 쓰러진다. 날카로운 소리에 사람들은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 옷에 묻은 비를 털어내고 젖은 몸을 덥혔다. 집으로 향하던 그 발걸음도 같았다. 미처 닫지 못하고 나온 창문이 생각 난 유조는 뛰지 못하는 제 발을 재촉했다. 우산을 썼지만, 비는 유조의 신발과 바지에 스미고 있었다. 땅에서부터 가장 가까운 곳부터. 일하는 곳에 우산이 남았기에 다행이지. 유조는 우산 손잡이를 꼭 잡으며 자신을 위로하며, 3층 건물 위에 있는 제 옥탑방으로 향했다. 건물 안에서 통하는 길도 있었지만, 문이 고장 난 탓에 외부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평소라면 손잡이를 잡고 잘 올랐을 계단이지만, 오늘은 상황이 달랐다. 녹슨 철 계단에 빗물이 흥건하다 못해 고이는 지경이었으니.
"..."
계단 앞에 멈춰선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할 수 있어. 별거 아냐."
말하며 자신을 속여보지만, 이미 겁을 삼킨 마음에는 듣지 않는 거짓말이었다. 한 손으로는 우산 손잡이를 꽉 쥐고, 다른 손으로는 계단 난간을 붙잡고 한 걸음씩 계단을 딛는다. 걸음, 걸음 디딜 때마다 찰박이는 물소리가 유조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제집이 이렇게 높고 먼 곳에 있었나. 겨우 4층의 계단일 뿐이었지만, 올라가는 순간마다 유조의 숨은 잘게 떨렸다.
계단의 끝, 옥탑방이 있는 옥상에 온전히 제 두 발을 올려놓고 나서야 유조는 겨우 계단에서 채 뱉지 못한 숨을 전부 뱉어놓는다. 우산과 계단을 얼마나 꽉 잡았는지 두 손이 빨갛다 못해 퍼렇게 질려있었다. 빨리 들어가 쉬고 싶은 생각에 잠시 멈췄던 발을 움직인다. 계단에서 유조의 집까지는 많은 걸음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조는 방금의 마음과 달리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들어가지 못했다. 문 앞을 가로막은 것 때문에.
"...아민 씨."
유조는 그 이름을 부르면서도 믿지 않았다. 그가 여기 있을 리 없다고, 그저 닮은 사람이겠거니 생각하며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불렀음에도 문 앞에 선 그는 답이 없었다. 움직이지도 않은 채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을 뿐. 잠시 주춤대던 유조는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을 망설이지 않았다. 이곳에 얼마나 서 있었을까. 다 젖은 그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주며, 그의 위로 쏟아지는 비를 막아준다. 아무 말도 없이 유조는 바닥을 보는 그를 한참이나 보고 있었다. 제 등이 젖는 줄도 모른 채.
아민은 문을 열지 못했다. 문 앞에 가만히 서서 하염없이 기다렸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저조차도 알 수 없지만, 아민은 기다렸다. 텅, ...텅, 텅. 계단을 오르는 소리만으로도 아민은 누가 이곳으로 올라오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문 앞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력감. 아민의 삶에 언제나 존재하던 그림자와 마주한 건, 도망치던 수많은 어제가 아닌 단 하나의 문을 열지 못하는 지금이었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칼날처럼 느껴진다. 몸속 깊숙이 들어와 비명도 지를 수 없을 만큼 숨을 죄인다. 고통을 가하는 행위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제게 닿는 빗물을 거두어 내는 것으로 이어진다. 아민은 불안하게 떨리는 숨을 가까스로 뱉어내 보지만, 되려 온몸으로 퍼지는 고통이 아민을 더욱 괴롭게 했다.
"아민 씨."
유조는 다시 아민의 이름을 불렀다. 이곳에 온 이유도, 답장하지 않은 이유도,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정원의 꽃들은 잘 있는지, 넓은 집이 외롭지는 않은지. 무엇을 물어도 답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아민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유조는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추우니까 우리 들어가요."
그저 아민의 몸에 묻은 물기라도 닦아주고 싶었다. 유조는 아민의 앞에 서서 열쇠를 꺼내 열쇠 구멍에 넣는다.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야옹. 두부가 울며 유조를 불렀다.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간다. 우산을 접어 세워 두고, 젖을 신발에서 발을 빼 집 안에 들어가 뒤를 도는 동안 아민은 들어가지 않았다. 아민이 고집을 부리는 것은 익숙했기에 유조는 아민을 부른다.
"아..."
"...아파."
아민의 이름은 채 유조의 입에서 완성되지 못했다. 익숙한 이름과 달리 아민의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도 낯선 탓이었다. 아민의 말에 유조는 그대로 얼빠진 얼굴을 하고 아민에게 묻는다.
"아파요?"
"무서워. 혼자 있기 싫어. 보고 싶어. 졸려. 힘들어."
"아파. 유조야."
아민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짧은 감정들의 나열에 유조는 더는 아민에게 묻지 않는다. 토막의 감정들을 얘기한 아민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유조의 얼굴을 마주한다. 비에 얼룩진 아민의 얼굴은 유조가 처음 보는 낯이었다.
검게 물든 하늘에는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인공위성의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 그저 오래도록 조용한 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