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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幽冥)의 강

w. 에본

  흰 사슴이 있었고, 숲이 있었고, 각자의 유해를 정리하기 위해 찾아오는 강이 있었다. 그 강의 이름은 지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있는데도 아무도 말을 안 해주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어리니까. 당장 죽지는 않을 테니까. 여기는 망자의 귓가에나 속삭여줄 만한 지명이니까. 적어도 그는 웃는 낯 그대로 아무 말이 없었다. 

 

 

 

 

 

 

 누군가는 죽었다고 했다. 누군가는 살았지만 다쳤다고 했다. 누군가는 생사를 도저히 알 방법이 없다고 했다. 온갖 풍문이 쉽게도 무너진 담벼락을 타고 흘렀다. 시인이 되고 싶다던 작은형의 노트를 훔쳐 읽었다. '한 명의 가여운 희망보다 열 명의 처절한 비탄이 마을 곳곳에 낮은 땅 빗물처럼 고였다.' 그 말대로 요사이 자주 비가 왔다. 누가 또 울음을 터트렸지, 싶어 귀를 기울여보면 그보다도 빨리 물비린내가 섞인 매캐한 악취, 혹은 비린내, 또는 피냄새가 웅웅 점막을 찔러든다. 남들보다 배는 후각이 예민하단 소릴 듣는 나로서는 퍽 난감한 일이었다. 마을 뒤편 동산으로 냉큼 올라가 하푸하푸 숨을 몰아쉬면 괜찮았으나, 어차피 땅거미가 지면 돌아가야할 땅이 여전한 걸. 거기다 이리 수선스러운 때 나돌면 좋지 않다는 작은 누나의 걱정 때문에 그마저도 곧 막혀, 이젠 아예 코가 맹맹하다는 느낌만 며칠째 받는 중이었다.  

 오늘 새벽에 온 전령은 건널목 도입부에서도 세 번째 집 막내아들의 부고를 가져왔다고 했다. 동이 트자마자 비옷을 꿰입던 작은누나가 부스럭댄 소리에 잠을 깬 내게 말해준 소식이었다. 도저히 떠지지 않는 눈으로 나는 다녀오라고 웅얼거렸다가, 누나가 문을 닫고 나선 후에야 가만히 그래서 그 죽었다는 형은 누구였던가를 반추했다. 느릿하게나마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기는 했다. 나와는 나이차가 애매해서 그렇게 교류가 많지도 적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가까이 사는지라 알 수밖에 없던 그 순둥순둥한 성격의 형 말이지. 난 그 형 이름을 아직도 모르는데, 그 형은 언제 외웠는지 종종 마주칠 때마다 내 이름 꼭꼭 불러주며 사탕 하나라도 쥐어주려 들기에 내심 싫지는 않았던 감상이 혼몽한 와중에도 떠올랐다. 그러다가 이내 다시 잠들었지만.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열 시가 넘었다. 또 비가 내리려는지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또 오전 내내 나는 멍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방금 전 나는, 점심 때가 다 되었는데도 누나가 아직 안 왔다고 굳이 빨리 돌아오라 할 것은 없지만 어떤지 대신 살펴 보고 와달라는 작은형의 부탁을 받았던 것이다. 신코를 탁 땅에 박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바람에 축축하게 반죽된 흙이 잠깐 겉면에 묻었다가, 일부러 발을 거칠게 털어내는 동작에 또 후드득 떨어진다. 나는 일부러 걸음을 재게 놀렸다. 물론 물 웅덩이를 밟지 않도록 빙 돌거나 잘 보고 뛰어 넘거나 했기 때문에 아주 빠르진 못했지만, 어쨌든 나는 코가 예민한 만큼 발도 빠른 편이었다. 열심히 흙바닥만 내려다보며 빨리 걸으려고 애쓰면 심부름을 빨리 할 수 있다는 것 외에도 장점이 또 있었다. 흐느끼기 직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어른들의 우울한 얼굴을 굳이 볼 필요가 없다. 묵묵히 마을 아귀에 온종일 서서 전령을 기다리거나, 찾아든 시체를 끌어안고 통곡하거나, 앓아누운 이 대신 유품을 정리해주거나... 각자는 나름대로 분주했다. 언제나처럼. 그런데도 나는 매번 길을 나설 때마다 나를 뺀 모두가, 모두 앞의 내가 어색했다. 하지만 분명 이 길목에, 이 마을에, 이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러운 활기가 넘치는 건 너무나 당연했던 때가 있었다. 나는 언제까지고 그럴 줄 알았다. 허구한 날 넌 아직 어리단 소릴 듣는 나라서 그랬던 걸까? 너무 이 세상을 만만하게 본 채 섣부른 기대를 하고 말았던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다른 집보다도 배로 몰린 사람들 속에서 간신히 작은누나를 발견했을 때는 유난히 꺼림칙한 냄새가 그 집에 온통 배어났다. 평소랑 다른 시체가 왔다고 했다. 총총 흩뿌려진 주근깨보다 희뿌연 반점이 퉁퉁 부은 독개구리 피부에 한가득이랬다. 이미 울음소리는 잦아들여 오히려 을씨년했다. 이러다 전염병이라도 도는 건 아니겠죠, 하는 어느 아낙의 속삭임을 모두가 들었지만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렇다고 시체를 방치할 수야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재수 없게 그런 소릴 한다고 타박을 놓기엔 충분히 현실적인 염려였기 때문이야. 작은누나가 내 귀에 묻지도 않았는데 속삭였다. 우리 남매는 다 사이가 좋았지만, 유난히 작은누나는 내 속내를 빠르게 알아맞추거나 아니면 나보다도 더 빨리 이해해버리곤 했다. 나중에라도 꼭 물어봤음직한 답변이라서 나는 눈만 깜박였다가, 작은누나의 축축하고 차가운 손을 잡아주었다. 나도 작은누나만큼은 아니어도 누나의 속내를 제법 잘 읽는 재주가 있으니까. 돌아가자, 누나. 그런 말을 굳이 뱉기도 전에 나와 누나는 동시에 발을 떼었다.

 작은누나는 이제 열여덟이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어른스럽고 똑부러진다고 주위 어른들은 열심히 누날 칭찬했지만, 그때마다 누나는 사양하듯 웃곤 했다. 누나는 원래 겸손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누나가 그때마다 덧붙이는 말도 나름 일리는 있었다. 저야 뭐가 대단한가요, 저보다야 언니나 오빠들이 더 낫지요. 나는 작은누나도 그런 말 굳이 안 해도 될 만큼 좋은 사람이라고 매번 생각했지만, 솔직히 작은누나를 포함해 하나같이 잘난 형제들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조금 어깨가 으쓱했다. 너희 집은 좋겠다는 친구들의 부러움 섞인 속삭임이야 뭐, 딱 질리기 직전까지 듣고 사니까. 하기사 큰누나 하나만 두고 보아도 나는 참 운이 좋은 동생인 셈이다.

 엄마와 아빠에 대한 기억은 많이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나를 가엾다 가엾다 하면서도 안도하듯이 우리 큰누나를 언급하곤 했던 건 기억이 유난히 잘 났다. 그 순간 누구보다도 안도했던 게 나여서일지도 모른다. 이 근방의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난 큰누나 덕분에 나는 처치곤란한 고아가 아니라, 앞으로도 아마 괜찮게 평범할 애였다.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던 까칠하지만 커다랗던 손을 기억한다. 몇 년이나 보지 못했지만, 누나의 소식은 누나가 직접 써서 부치는 편지보다도 더 꾸준히 더 빠르게 들려왔다. 잘은 모르지만 고향에 남은 우리 사남매가 부족함 없이 생계를 꾸릴 정도로 큰누나가 잘나간다는 건 내 또래가 더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고만고만한 살림살이라곤 해도 나는 친구들한테 기분 내킬 때 냉큼 사탕 몇 개 정도 사줄 수 있으니까. 큰누나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우리 집의 제일 큰 자랑거리고 버팀목이고 가장이니까.

 큰형도 그렇다. 큰누나 얘기가 나오면 매번 겸연쩍은 듯 굴었지만 그러는 큰형도 인기가 참 좋은 사람이지. 우리 가족은 다 우애가 좋단 소릴 듣지만서도,  유난히 큰형은 덥썩덥썩 끌어안거나 꿀바른 말로 다른 형제들을 질색시키곤 했다. 그걸 보며 또 혼자 웃음이 터져서 경망스럽게 허리를 접어가며 웃는 게 또 얄밉지만, 음. 그래도 다들 말 많고 웃음 많은 큰형을 좋아했다. 물론 나도. 그런 큰형은 내가 싫다고 버둥대도 기어이 무릎에 앉히곤-솔직히 그렇게까지 싫었던 건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냥 형과 나 사이의 암묵적인 장난이었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솔찬히 큰누나랑 비교를 받았다느니, 그런데도 큰누나가 너무 잘나서 별다른 생각도 안 들었다느니, 질투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오히려 큰누나가 용돈을 갈라서 맛있는 걸 입에 넣어줄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런 거 깜박 잊게 되고 말았다느니 하는 나름의 추억거리를 늘어두곤 했다. 결국 큰누나를 따라가고 싶다며 지금이야 집에 없지만, 근래 너무 바빠져서 당분간 소식이 뜸할 거라며 보낸 넉달 전의 편지마저 몇 장을 읽어도 끝이 안 나 결국 던져두고 작은형이 소리내 읽어주는 걸 대충 흘려들었다.

 그래서 지금 집에 남은 건 유난히 잘생긴 작은형이랑 지금도 내 손을 잡고 귀가중인 작은누나인데, 둘 다 성격이 사분사분하니 착해서 만일 내가 큰누나의 명성을 뛰어넘을 정도로 심술궂은 꼬마였어도 둘이라면 어떻게든 잘 보살펴줬을 것 같다. 난 솔직히 그만큼이나 착하진 않지만, 그래도 우리 형이랑 누나가 날 얼마나 사랑해주는진 알고 있으니까 나름 인사성 밝고 착하단 소리 들을 정도로는 굴고 있다. 작은누나가 대문을 밀어준 틈에 얼른 집에 들어서자 이번에는 작은형이 신발장 앞에 서있다. 나를 보자마자 부드럽게 웃어주며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칭찬의 손길이 어쩔 수 없이 좋아서, 나는 조금 자랑하듯이 누나를 무사히 데려온 것부터 내가 보고들은 사정을 간추리려고 입술을 달싹댔다. 그 바람에 금세 뒤따라 들어온 누나가 그런데 오빠, 어디를 가려고? 하고 여린 목소릴 내는 걸 듣고서야 뒤늦게 나도 눈 깜박였다. 참. 나도 그것부터 물어봐야했는데. 작은형은 미미하게 웃었다. 우리 가족 중에서도 유난히 섬세한 작은형은 가끔 그렇게나 견딜 수 없이 불안해했다. 큰형의 소식이 새로 왔대서 나가보려고. 후드득, 얼마 가지 못해 갑작스러운 장대비가 마당에 쏟아지는 소리가 따가웠다. 그러고보면 작은형은 이제 스물이 되었다.

 

 

 

 

 

 

 작은누나가 내 이마를 쓸며 우는 일이 작년부터 가끔 있었다. 자는 나를 깨울 정도는 분명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그럴 때마다 가슴이 조이는 기분이 들고 눈이 떠졌다. 그때부터 작은누나랑 작은형이 내는 사소한 인기척에도 번뜩번뜩 눈이 뜨이곤 했다. 나는 아기 때부터 한 번 잠들면 절대 안 깨는 편이었다는데 신기하지. 그렇지만 지금은 더 신기한 상황이 분명하다. 아무도 나의 이마를 쓸지 않았지만, 나는 잠에서 깨어 두 눈을 또렷하게 떴다. 홀연히 나타난 내 앞의 흰 사슴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사슴은 제법 컸다. 꽤 거리를 두고도 가늠하건대 내 몸집의 두세 배는 될 것 같았다. 나는 첫눈에 희었다고 느꼈지만, 자세히 보니 또 마냥 흰 털은 아니었다. 옅은 푸른빛이 끝에 돈다.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봤는데도 내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지, 사슴은 우거진 검푸른 잎사귀 사이로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푸른빛이 군데군데 번진 건 그 사슴뿐만이 아니었음을. 사슴이 스치고 간 나무, 들꽃, 혹은 허공에 떠오른 빛... 온통 숲이 푸르른 은빛으로 고아하게 빛나고 있었다. 엄마와 큰누나를 닮아 이럴 때 나는 되려 침작해졌다. 음, 이건 전혀 일반적인 일이 아니잖아. 

 이어서 열심히 생각해보니 지금 이 순간을 이루는 요소는 죄다 이상했다. 분명히 나는 처음 보는 숲속에 있다. 분명 작은누나 옆에서 평소처럼 잠을 청했을 텐데 이상하게도. 그렇지만 나 같은 애를 납치해서 이런 데 홀로 버려둘 까닭은 또 뭐람. 캄캄한 하늘이며 동그란 달을 보니 시간대는 분명 밤인 듯 한데 도통 영문을 알 수가 없다. 더군다나 평소와 다른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미아는 얌전히 자리를 지킨 채 어른을 기다려야 한단 걸 잘 숙지하고 있을 나는, 그런데도 어쩐지 여길 벗어나 사슴의 뒤를 쫒아가고 싶어하고 있지 않은가. 이 숲의 유일한 기척이 저 사슴뿐이라서? 아니면 그냥 신비한 무언가의 정체가 궁금해서? 그것도 아니면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은 꿈이라고 믿어서? 맨발에 닿는 풀잎의 감촉은 촉촉했고, 실수로 손등에 부딪친 나무 겉껍질은 까슬했고, 갑자기 뛰느라 폐가 오그라들고 큰 숨이 고팠는데도?

 사슴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걸음은 차분했고 동작은 유연했다. 딱 내가 기를 쓰고 쫒아갈 수 있는 정도였다. 조금만 더 내가 덜 건강하거나 덜 민첩했다면 무리였겠지만. 사슴은 여유로웠고 나는 갈급했다. 숲 곳곳에 연푸른 빛이 떠올라 어둡지는 않았지만 나는 제 풀에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도 하고 낮게 드리운 가지에 머리를 부딪치기도 하고 하마터면 사슴을 놓칠 뻔도 하다가 간신히 따라잡기도 했다. 그때마다 힘들거나 쓰라린 감각이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적이라 나는 이게 꿈인지 아닌지 스스로도 헷갈려 죽을 지경이었다. 몇 분을 그렇게 사슴 뒤꽁무늬만 쫒았는지 모르겠다. 탈진 직전에야 나는 드디어 사슴이 풀숲의 끄트머리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고, 이 악물고 따라 그 너머에 뛰쳐들었다. 

 도도히 흐르는 강이 하나 있었다. 소리조차 거의 나지 않도록 유려하게 물이 흘렀다. 온통 연푸른 빛이 호롱처럼 여기저기 내걸리고, 흔들리고, 부유했고, 별처럼 떠있거나, 이슬처럼 떨어졌고, 너무 밤하늘이 까매서 순간적으론 동굴 같았고, 다시 찬찬히 살펴보면 숲 속의 작은 공터 같았고, 막상 나를 여기로 이끈 원인인 흰 사슴은 찾아볼 길이 없었고, 이상하게도 물냄새도 바람냄새도 그 어떠한 향도 나지 않았다. 다만 경치를 제대로 볼 겨를이 없던 나는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한참이고 심호흡부터 했다. 어느 순간 다시 이 광경을 눈에 담고자 고개를 들어올렸을 때야 내 앞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만큼 내 정신은 혼미했던 것일까.

 

 "누구세요?"

 

 의식할 겨를도 없이 질문이 새었다. 내 말에 입꼬리를 조금 휘어주는 상대는 덕분에 척 봐도 다정하게는 보였지만 대신 성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키가 제법 컸고, 처음 보는 복식을 차려입고 있었다. 하나도 눈에 익숙한 게 없이 낯설기만 한 사람. 그런데도 나를 향한 적의가 하나도 없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 것 같았다. 얼굴을 비스듬히 가린 엷은 천 사이로 드러난 선이 고왔다. 주변의 빛을 한껏 받고 선 그 자의 머리카락마저 아른아른 강물의 색을 닮아보였다. 젊은 어른, 아마 작은형과 너무 차이나지 않을 나이일 것이다. 어림짐작이지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 번 더 똑같이 물었다. 목소리라도 들으면 좀 누군지 알겠지 싶었다. 

 

 "누구세요?"

 "이 숲과 강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음. 들어도 성별을 가늠하기 힘들 줄이야. 뭐라고 상대를 지칭해야하나, 곤란하기 짝이 없다. 거기다 어린 나한테까지 존대를 써줄 건 없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오셨나요?"

 

 거기다 상대가 도리어 질문을 해올 줄도 미처 몰랐다.

 

 "어... 그게요. 어쩌다보니?" 

 

 와, 무성의해. 내가 한 대답이지만 참 볼품이라곤 없다. 하지만 정말로 답할 말이 궁한 것을 어쩔까. 슬슬 나는 이 사람이 날 해칠 의사가 없다는 건 믿기 시작했다. 그야 친절한 얼굴로 어린애한테 존대를 써주다못해 날 위해서인지 무릎을 굽히고 있는 사람을 경계하기도 힘든 법이다. 대신 이 사람의 소유지에 덜컥 밀고들어온 혼나야할 어린애로 취급받는 게 아닐까 두려워지고 말았다. 하필 시간도 늦었으니 완전 사고뭉치 확정이네. 귀한 열매라도 함부로 따먹었단 누명을 쓰는 건 아니겠지? 애당초 여기는 딱 봐도 범상치 않으니, 마음대로 들어오는 것부터 금지된 구역일지도 몰랐다. 관리자가 떡하니 상주할 정도면 분명 그렇겠지. 누나나 형이 나 대신 고개 숙여 사과하는 건 보고 싶지 않단 생각부터 불쑥 들었다.

 

 "괜찮아요. 다만 이렇게 어리신 분이 홀로 강에 오시는 건 처음이라 여쭈었습니다."

 "정말요?"

 "네."

 

 그러니 사르르 다정한 목소리가 날 달래듯이 이어지지 않았다면 냅다 고개부터 숙였을지 모르겠다. 대신에 이어진 말을 들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이어 이 곳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한 번 천천히 웃었다.

 

 "여기는 죽은 이의 유해를 강에 흘려보내려 찾아오는 곳이거든요."

 

 살아오면서 나는 이 강에 대해서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그렇지만 점점 나는 사내와 대화를 나누며 확신했다. 이 강에 누군가 꼭 와야 한다면, 내가 와야만 한다고.

 그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고 성별을 확언하지 않았으며 열 개의 질문에 서너 개쯤 응답하는 등 아주 성실한 답변자는 아니었으나 내내 상냥하고 보드라운 어조를 유지했다. 내내 이상한 기분이었다. 선문답을 주고받는다는 게 이런 걸까 싶었다. 허나 그가 말하길, 다른 어른들도 이 강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했다. 또한 그가 말하길, 최근 이 강에 맡겨지는 시체의 수가 늘어나고 있음을 본인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를 처음 보았을 때도 평소와 다름 없는 방문객의 기척인가 하였는데, 빈손에다가 아무리 봐도 어리둥절한 낯의 어린아이라 그도 놀랐다는 얘기를 너무나 차분한 낯으로 조곤히 건네왔다. 눈 뜨니 숲속이었단 말에는 크게 의아해하지 않는 것 같았으나, 사슴이 날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말에는 그도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하지만 하나는 아주 분명히 말해주었다.

 

 "괜히 여기에 오시게 된 건 아닙니다. 지금은 빈손이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예를 들면요?"

 아주 상냥한 목소리였다.

 

 "이미 혹은 곧. 가까운 누군가가 죽는다거나요."

 

 정말로 지나칠 만큼 상냥한 목소리였다.

 

 그렇다면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이 강에 올 만한 적임자라고 생각한다. 작은누나는 은근히 몸이 약했고, 작은형은 그렇게 비위가 좋은 사람이 아니었거니와, 그냥 둘은 태생이 무르고 여린 사람들이다. 그나마 나이는 제일 적어도 제일 씩씩한 사람을 꼽으라면 틀림없이 나지. 이웃집 어른들도 죄다 인정할 사실이었다. 원래라면 우리 남매는 아직 어리니 다른 이웃집 어른들이 거들어줄지도 몰랐다. 하지만 병색이 짙은 시체를 처리하는 건 일반적인 시체를 처리하는 것과는 아예 궤가 다르단 걸 안다. 이웃집에 사람들이 평소의 배로 몰렸음에도 죽어버린 형을 둥글게 둘러싸고 웅성거리기만 하던 건, 수습을 도맡을 단 한 명을 결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란 걸 안다. 나는 늘 보호받았다. 수많은 사건에서 멀리 놓여있는 위치였다. 그러니 어른들이 이 강에 대해서 입도 벙긋하지 않은 것일 테다. 하지만 그의 말이 정녕 맞다면, 이번엔 달라야한다. 나는 어른들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이 강을 찾아내지 않았는가? 한 번 왔는데 두 번은 못 오겠는가? 유일한 걱정거리라면 아무래도 누군가를 이 강에 데려오기엔 아직 내가 팔힘이 부족하고 덩치도 작다는 건데 번쩍번쩍 업거나 안은 채 데려오진 못하겠어도 어떻게든 수가 있을 것이다. 꾀를 쓰고 배로 시간을 들이면 나라고 못해낼 건 또 뭐가 있겠어.

 

 그러니까. 굳이 그런 말을 한 그를 원망하듯 곧바로 울어버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참 이상하지. 잘 안 되었다.

 

 수많은 원망을 뱉어냈다. 나중에는 거의 악을 쓰듯 울었다. 그의 말뿐만 아니라 이 모든 상황을 탓했다. 그냥 이 세상 전체를 욕했다. 마지막에는 당신이 무언가 해줄 수 없느냐고 염치 없이 매달려도 보았다. 이 기묘한 강을 관리하는 당신이라면 무어라도 해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차마 당신 말은 순 거짓말이라고, 그런 농담 따위 하지 말라고 비난할 수는 없었다. 유난히 그 말만은 입 밖에 나오질 않았다. 시시껄렁한 악담 정도로 치부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하필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다정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비로소, 제대로 비참해졌다. 목 막히듯 억억대며 울다 못해 마지막엔 구역질이 났다. 사내는 다정하게 나를 내려다본다. 큰누나처럼, 큰형처럼 내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주는 손길이 따스했다. 그러다 또 웃는다. 도저히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기이한 낯으로, 보드랍게. 

 

 "곧 다시 오시게 될 거예요."

 "앞으로도, 더 많이."

 이후 나는 아주 천천히 귀가했다. 누나가 잠들어있는 이부자리 옆을 파고들었지만 다시 잠이 오는 일은 없었다. 밤은 여전히 깊기만 했다. 따라서 잠들지 못한 나는 내가 너무 일찍 어른이 될 거라고 느꼈다. 아주아주 많이 울어서 그 눈물이 하나의 강을 이룰 때까지 슬퍼할 어른이 될 거라고 느꼈다. 내 다른 형제들이 그랬듯이, 그러나 그들의 몫까지 떠앉아 몹시 울게 되리라. 평생 잊지 못할 일종의 강력한 예감이었다. 그런데도 당장 사위가 고요하므로- 나는 가만히 들리지 않는 빗소리를 기억 속에서 더듬었다. 숨이 가라앉는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살고 싶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 그러고 싶었다. 모두가 충분히 잠들어도 좋다 허락할 이 시간의 나처럼. 동이 트고 형이 이 집을 떠나겠다고 말할 때까지 여전히 침묵은 이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작은누나가 울음을 터트릴 때까지. 그리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야할 내가 드디어 무언가를 알게 된 '척' 할 때까지는. 그저 오래도록 조용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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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합작은 에본(@Ebon_nim)의 2차 지인제 글 합작입니다. 일체의 무단 전재 및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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