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가을아, 너는

w. 월향

 저물어가는 생애를 바라본다. 가을에 머무른 연명은 작별 인사에 익숙했다. 낙엽에 마음을 실어 보내고, 풀잎에 바람을 날려 보내며 안녕을 고하는 일상. 자욱한 걸음은 헤쳐 나가는 순간순간을 안식으로 바꾸어나갔다. 감흥은 침전해버린 흔적뿐이라 주워들기에도 하찮다. 영원히 시들어가기만 할 뿐인 세계. 똑딱똑딱, 똑딱똑딱. 쓸쓸한 초침만을 남기고 흘러가 버리는 만남과 도돌이표처럼 서성거리기만 하는 모래들. 시간의 굴레에서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어루만질 뿐인, 오로지 관망과 조망이 전부인 흐름.

 

 상처 입은 짐승들은 하나같이 오래 걷지 못했다. 그만큼 제 곁에서 스러지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들을 품어주고,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일은 제 역할 중 하나였다. 절뚝거리던 그 맹수는 유독 시커멨다. 몇 번이나 돌아보고 말았던가.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으면, 얼마나 드러내지 않고 숨겨왔으면 저토록 까말까. 검댕이 얼룩이 파고들어 원래의 빛을 잃어버린. 다가오는 이들을 물어뜯어버릴 듯한 으르렁거림에도 여전히 심안은 고요했다. 제 손길만 닿으면 얌전히 눈을 감을 아이들이다. 위협적인 소리라고 한들 겁을 집어먹을 리도 없거니와, 모처럼의 감상이라 한들 미련이 남을 리도 없었다.

 

 언제나와 같았을 위안. 언제나와 달라진 평안. 바스러지지 않는 형태, 무너지지 않는 발디딤. 맞닿은 위로에 기대지도 않고, 사납게 달려들어 갈기 뜯지도 않고.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이고 느끼고는 물처럼 빠져나간 짐승의 털 한 올만이 손가락에 걸린 채로. 비틀거리면서도 나아가는 뒷모습은 추락하듯 보이면서도 여전히. 겹겹이 쌓인 무덤을 신경 쓰지도 않고, 제 갈 길을 찾아 떠난 잠시간의 체온이 낯설었다. 작별 인사는 익숙했을 텐데.

 

 그럼에도 곧 잊힐 거라고.

 그 아이를 제 곁에 재우지 못한 아쉬움일 뿐이라.

 

 굼실굼실 일어난 파문에 자장가를 나직하게 섞어 들게 한다. 휴식을 향해 달려가는 계절. 돌고 돌아 무엇도 남지 않고, 남기지 않고 스러져가는 공간. 관성처럼 메마른 시간은 답답하게 목을 옥죄는 갈증에 물음표 하나만을 찍고서 고개를 기울인다. 손가락에 엉겨 붙은 터럭은 한 줌의 다른 채색이 되어 있었다.

 

 세상은 변함없이 흘러간다. 수없이 많은 쉼표와 온점이 곁에 머물렀다가 영원히 잠드는 순환의 밤. 그중 유난히 새카맣게 물들어 있던 물음표를 회상한다. 손가락에 감긴 색채는 지워지지 않는 증표가 되었다. 안타까워했던가. 어쩌면 부러워했던가. 굳어져 버석버석해진 감정의 골은 무엇에 걸려 되풀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위태로웠던 걸음. 고고하게 홀로 걷던. 의문은 메아리처럼 되풀이된다. 그 아이는 설원에서 잠들었을까. 하얗게 쓰러졌을까. 다시 볼 수 있을까.

 

 얼마만큼의 새벽을 넘었던가. 검댕을 뒤집어쓴 비틀거림을 발견하고, 환상이 아닌가 의심하고, 비로소 멎어있던 고동 하나를 깨닫는다. 나는 너를 그리워했구나. 그만큼이나 상처를 입고도 의연하게 홀로 걷던 너를 다시 보고 싶어 했구나. 너는 여전히 강한 척을 하며 어깨를 펴고 있었다. 그 호흡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에 세계가 환하게 밝아온다. 살랑이는 구름. 여전히 쓸쓸하지만 따스한 공기가 피부를 간질이는, 마치 탄생과 시작이 되어버린 듯한 착각이 낮을 비춘다.

 

 덜컹, 멈추지 않고 흘러가야 할 시간이 흔들렸다. 너의 곁. 마찬가지로 상처를 입은 짐승이 걸음을 맞추고 있어서. 너의 동행을 깨닫고 만다. 언제부터 함께였을까. 저무는 이에게는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장소에서는 무엇 하나 출발하지 않는다. 그저 머물다 사라지는 곳. 자신 역시 그러하고, 그러하게 만드는 존재.

 

 두 번째 열매가 깨어진다. 아아, 그래. 그 아이들이 더 이상 아프지 않길 바랐다. 오래 괴로워했던 영혼들을 애틋하게 여겨, 그 모든 아이를 사랑하여서, 자신은 여기에 있었다. 아득한 모래시계 속에서 마모되어버린 아픔. 아직 걸어갈 수 있는 아이들은 어루만져주며 격려하고, 상처받고 괴로워하며 굴러떨어지는 아이들은 보듬어 안아주어 휴식을 주었다. 그 과정, 그 모습을 지켜보는 스스로가, 약해빠진 제 마음이 잘게 찢어지기 전에 말려버리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눈에 밟혔다. 마음이 쓰였다. 살아가는 게 너무 고단해 보였기에, 네가 제 품에서 쉴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너는 그런 건 모른다고 추운 언덕을 넘어갔고, 다시 돌고 돌아서 자신의 저묾으로 발을 내디뎠다. 저 독한 검댕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고 있는데도, 의연한 너는 이제 서로 의지할 대상까지 있었다. 그 강한 걸음에 응원 이외에 무엇을 보내야 할까.

 

 폭우가 쏟아진다. 황급히 비를 피할 쉼터를 만들어주며, 함께 걷던 아이들이 뛰어드는 광경을 지켜본다. 저 아이들의 상처도 씻겨나갔으면. 어느새 날은 어둑하다. 오늘 밤은 쉬어가겠구나. 우울하게 낮은 중얼거림이 낯설다. 익숙할 뿐이던 작별 인사가 아쉽다. 특별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한다. 이해할 수 있게 되어 버렸다. 마음을 멈춘다. 그 이상 깨달아서는 안 된다고, 브레이크를 건다. 단단히 자물쇠를 걸어 잠구었다. 깨달으면 무너지게 된다. 나는 나의 역할을 해야지. 너희가 다시 돌아왔을 때, 다시 위안을 줄 수 있도록 기다려야만. 그러니.

 

 서로를 보듬어 안는 상처 입은 짐승들을 멀찌감치서 어루고 지나간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기를. 평안이 있기를.

 

 그저 오래도록 조용한 밤이었다.

00:00 / 03:24

본 합작은 에본(@Ebon_nim)의 2차 지인제 글 합작입니다. 일체의 무단 전재 및 도용을 금합니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