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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w. 믹

김춘수, ‘꽃’으로부터 부제 차용

 

 

 

1.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지독한 겨울이었다. 하루종일 뉴스 밖에 나오지 않는 채널에선 이번 겨울이 고되었다고 떠들었고 사람들은 그렇다고 다들 맞장구를 쳤다. 나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겨울이 거의 끝나간다는데 나는 아직 겨울이 겨울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내게 계절이란 바깥에 잠깐 나갈 수 있었던 저번 여름이 전부였다. 나는 더이상 구태여 힘을 다해 앓을 것도 없는 얌전한 병명과, 내 이름을 나란히 눕힌 침대 위에서 투명한 유리창으로 전해져오는 어슴푸레한 추위만을 손끝으로 느꼈다.

 울창한 나무가 있는 곳에서 그나마 맑은 마지막 숨을 쉬자고 여기까지 옮겨왔으나 이곳 역시 겨울의 눈발을 피하지는 못하는 곳이었던 탓에 나무들마다 옷가지 대신 걸친 것이 새하얀 눈 말고는 없었다. 나를 이곳까지 이끌고 와준 당신은, 불쌍한 이의 마지막 바람을 들어주지 못한 게 퍽이나 마음에 걸렸는지 정말로 괜찮으시겠냐고 몇 번을 물었다. 나는 별 다른 저항도 없이 초라한 생을 끝맺고자 하얀 나무도 좋다고, 여기 눕겠다고 답했다.

 당신은 일어나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내게 병원의 주의사항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짚어주었다. 좁은 어항 속에 갇힌 물고기마냥 입술을 움직이며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당장 내일 모레 눈을 감아도 이상하지 않은 이에게는 별 필요 없는 허튼 짓이었다. 당신도 그쯤은 알 텐데, 그랬다. 그런데도 그랬다. 나 같은 이도 아는 것을 모르는 척 굴었다. 꺼져가는 것은 꺼져가는 것일 뿐 그에게 아무리 물이나 불, 애정이나 어떠한 물질적인 것을 쏟아 부어도, 다 헛됨이란 것을 알아두어야 했다. 하불실 이제 와서 마음 몇 조각을 줄까 싶어도 당신과 나의 거리가 멀어야만 이 겨울의 끝 또한 좋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했다.

 

 

2.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기록에 대한 고찰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펜을 잡지도 못하고 손끝으로 손바닥에 무수한 글자들을 두서없이, 빼곡하게 적어나가기만 했다. 당신은 나를 위해 울고, 나는 그런 당신을 축복하며 그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아무에게나 보여줄 수 없는 그을린 문장들이 손바닥에 남았다. 남은 시간은 이제 손으로 꼽아 계산해봐야 고작 얼마였다. 부서지는 노이즈가 망막에 먼지가 끼인 듯 지저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런 시야를 가진 나와 당신이 보는 것은 당연하게도 달랐다. 설령 같은 방향을 보았다 하더라도 당신은 절대, 내가 보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이 또한 당신도 알지 못할 터였다. 나는 내게 보이는 것들을 무어라 불러야 하는지 몰라 마땅히 부를 만한 이름을 한참 고민하다 종국엔 당신의 이름을 붙이고 말았다. 나에게만 보이는 환한 여름의 햇빛. 당신이 웃을 때마다 내 두 손에 내려오던 것들이다. 나는 금방 울적해졌다. 당신 때문이었다.

 

 

3.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차라리 끝이 고통의 절정에 찾아와준다면 다행일 일이었다. 끝은 생각만큼 그리 마냥 친절하지 않아서, 의연하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우리의 모든 고통을 우리가 다 떠안고, 고통의 고비들을 넘어, 마지막 남은 처연함까지 긁어모아 모조리 맛본 후에야 끝은 찾아왔다. 이제는 깨끗한 황무지가 되어버린 고통의 숲을 슬그머니 지나쳐오는 것이다. 나는 어쩌면 이미 고통의 처연함까지 맞이한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남은 고통을 삼키고,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던 훌륭한 절정을 그리워하며 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삼키며, 삼키며. 나를 좀먹어가며.

나는 당신에게 매달려 나 하고 싶은 이야기만 지껄이는 날들을 반복했다. 당신은 내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재미날 정도로 명석한 두뇌를 가진 당신이, 지금 생각을 하느라 얼마나 바쁠까. 당신이 익힌 것이라고는 딱딱하고 구체적인 지식들뿐이니 이런 추상적이고 애매한 대화주제로는 물론 내가 우위임이 분명했다. 당신이 무슨 답을 해도 내가 원하는 쪽으로 이끌 수 있었다. 아니라면, 당신이 그저 내게 져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곧 죽을 것, 가여우니까 장단 맞춰주는 건가? 나는 자꾸만 마르는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죽으면 당신은?

 당신은 내가 답을 주었는데도 답하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아 당신과 맞추었던 시선을 끊어버렸다. 숨이 막혔다. 당신은 종종 나를 죽였다. 나는 당신의 그런 표정을 보자고 이런 것이 아녔다. 내가 당신에게 살고 싶다고 몇 번이나 말했나. 나로 치면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이었다. 생존을 위한 일차적이고 원초적인 헛짓거리였고 죽어가는 감정을 끌어당기는 낮은 소리였다. 가장 진하고, 질기고, 축축하고, 질척이고, 무겁고, 눅눅하고, 더럽고, 추하고, 어리석고……. 더 나열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이 문드러진다. 나는 더이상 당신이 쉽게 주는 애정 따위를 구걸하고 싶지 않았다.

 

 

4. 그는 나에게로 와서

 

 나는 당신에게 무엇이었나. 나는 묻지 못했다. 당신의 입에서, 으레 다른 의사들이나 장의사들이 그러하듯 나를 끝이라고 명하는 소리가 나올까 겁이 났다. 당연한 사실임을 아는데도 당신이 그런다면 나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선생님.

 나는 당신을 작게 부르곤 했다. 내가 좋아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되려 당신이 그 부름을 들으면 아이처럼 좋아하며 나를 돌아봐주기 때문에 종종 그랬다. 살려달라며 옷자락을 붙잡고 울부짖는 일이 비일비재한 곳에서 얌전한 소리를 내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꾸미지 않고 말하자면 나는 죽으려고 당신을 만나러 온 꼴이었으니 당신을 보면 일상적인 시답잖은 대화나 나누고 싶은 게 전부였다.

 

  무슨 향수예요?

 

 당신은 나를 좀 더 특별한 사람 취급을 했다. 침대에 누워 가만 약이나 받아먹는 신세는 나나 저들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향이 좀 셉니까?

  아니, 그냥 궁금해서…….

  아,

 

 당신은 입을 벌린 모양 그대로 낮게 소리를 뱉었다. 무언가 내게 대답해주고 싶은 것을 생각하는 듯 입술을 다시 다물었다가 열었다.

 

  국화 향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물을 주러 다녀와요.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내가 당신에게 뭐라도 된다고 감히 단호한 말을 냈을까. 당신은 찍어낸 듯 똑같은 끝 사이에서 조금 흥미로운 것을 골라낸 게 다였을 텐데. 그런 건 달갑지 않은 사실이지만 당신도 나도 충분히 이기적이니까 구태여 따지지 않았다. 나는 죽음 사이에서 당신을 찾아냈고, 당신은 괴롭힘 사이에서 나를 찾아낸 것으로, 서로 좋자고 서로의 좋은 부분만 빨아내고 있지 않은가.

 

  받은 선물 중 하나였나 보네.

 

 그 말 뒤로 당신은 말 없이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혹시라도 짧게 대답할까 두려웠다. 저들에게 하는 것처럼 굴까 무서웠다. 어째 나는 모두가 무서워하는 끝도 가리지 않는데, 유독 당신 앞에선 무서운 게 많았다. 당신의 무성의한, 절반이 툭 잘려나간 대꾸는 도무지 듣기가 싫었다. 부드럽게 풀리지 않은 얼굴 근육을 마주하는 것도 싫었다.

 

  그냥 물어본 거예요. 국화, 안 싫어해.

 

 결국 내가 또 한 마디를 더 지었다. 국화에 대한 이야기를 뭐든 늘어놓아도 나는 그게 참인지 아닌지 알 턱이 없으니 괜찮을 텐데 당신은 무슨 고집을 그리 피우는지 끝까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짙은 향기였다. 나는 그 속에 갇혀 발버둥 치다 물은 것이었다. 폐부의 밑바닥 그 어딘가에서부터 감정들이 끓어올랐다. 편찮은 감정들. 시작만은 좋았다. 시작만은 좋은 불순이었다. 고운 입자들이 무서운 속도로 퍼져나갔다. 공기 중에 즐비한 국화 향을, 당신 향이라고 여기며 호흡하는 나였다. 나는 당신을 불렀다. 마치 새롭고 낯선 언어를 들은 양, 당신은 멎은 채로 몸을 틀었다. 나는 금방 울고 싶어졌다.

 만일 이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얼마나 하찮은 허상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5. 꽃이 되었다.

 

 나는 당신을 포함한 고까운 일들까지도 사랑하려다 실패하곤 모든 것에 진부함을 느꼈다. 애써 잡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간신히 숨겼던 것들을 다 보여주고 싶었다. 아프지 않게 죽거나 죽기 직전까지 아프기를 바랐고, 내 말들이 내 일부거나 사실은 내 전부라고 여기고 싶었다. 모든 관계를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구기고 부수어 망가뜨리거나 우위가 아닌 밑바닥에서 기며 동정 대신 사랑을 구걸하고 싶었다. 문제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랑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이렇게 상하는 게 분명했다.

 조금 더 희고, 순수하고, 또는 어쩌면…….

 여전히 당신은 내가 불러주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근처를 서성였다. 끝에게 필요 이상의 지나친 관심을 쏟는 어리석은 당신. 당신이 그 무엇도 아니길 나는 가끔 바라기도 했다. 매일 나를 그리고, 생각하고, 기억하길 바라면서.

 

 

6.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순백의 커튼이 흔들렸다.

 

 

7.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마른 분필가루 같은 당신의 입김만이 열기의 생존을 고했다. 내게도 그런 숨결이 아직 남아있을까. 나는 당신의 어깨를 끌어안아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손가락이 굳어 그러지 못했다. 당신은 드디어 손을 들어 시간을 셌다. 열기에 스미는 습기가 두텁게 피부에 닿았다. 작은 울음이었을 수도 있는 객관적이지 못하는 소견이라고 당신이 말했지만 이미 나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나는 어차피 하루로만 만족하는 한낱 꽃잎이었다. 그리고, 최절정의 봄. 나는 당신과 봄 얘기를 하고 싶었다. 내가 없을, 내가 보았었던 봄. 손가락마다 걸린 애절함이 당신을 쥐어뜯었다. 나는 당신의 세포 하나가 아쉬웠다. 봄내음이 나를 약 올리듯 창 안으로 흘러넘쳤다.

 나는 눈을 감으면 그만이지만 당신은 생의 남은 시간을 연이어 나를 생각하겠지. 순전히 잘못된 것이다.

 

8.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자꾸만 눈이 감겼다. 느낄 수 있었다. 봄이 당신을 위해 오고 있었다. 한낱 꽃잎인 나를 앗아가고 화려하게 당신의 옆자리를 차지할 테다. 이제 나는 살려달라고 빌고 싶었다. 당신에게 특별한 취급을 받는 것도 되었고, 미움을 받아도 좋았다. 지금 돌이켜보니 헛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당신이 좋았다. 나는 끝이라, 생이 이런데도 당신이 좋았다. 공기가 옅게 호흡기 안에서 짓물렀다.

 

 내일, 꽃이 피겠다.

 

 

 

9.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무엇도 사랑하지 못하는 외로운 이가 오늘도 서툰 낮들과 허튼 밤들, 그리고 상실의 두려움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저 오래도록 조용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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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합작은 에본(@Ebon_nim)의 2차 지인제 글 합작입니다. 일체의 무단 전재 및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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