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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종이 약합을 챙기고 쓰러진 소년을 처소로 내어간 뒤, 간신히 버티고 서 있던 숙신의 몸이 크게 휘청인다. 은발의 사내가 놓치지 않고 재빨리 팔을 뻗어 공주를 끌어안아 온후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쇠해진 몸에 정순한 기가 밀려들어오자 숙신의 숨결이 편안하게 되었다.

 

 

 "고맙구나, 청휘淸輝."

 "침소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잠시 기다리거라. 내 채리에게 명할 일이 있다."

 

 

 검을 제압하기 위해 피를 흘리고 무리하게 주술까지 쓰느라 기력이 많이 소모된 상태였으나 오히려 안광이 현현하니. 지독하고 가련한 사람.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육체에 갇혀 고통 받기에 그 영혼 너무나 고귀하고 강인하여라! 청휘는 자신의 주인을 볼 때마다, 무수히 흘려보낸 이전의 시간에서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눈을 뗄 수 없게 빛나는 사람. 진창 속에서 고고히 머리를 치켜든 백학. 밤하늘의 별. 찰나를 불사르며 타오르는 폐허의 불.

 

 

 하필 이러한 시대에 이러한 힘을 지니고 기이한 용모로 태어났다. 원하지 않은 아이로 축복하는 이 없이 부모에게 외면 받았다. 차디찬 침상에 방치되어 첫 울음을 터뜨렸고 무수히 쏟아지는 생명의 위협과 수모를 견디며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마침내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황궁 문 밖을 나선 그 날. 눈앞에 펼쳐진 광대한 천하를 바라보며 숙신은 자신에게 저주받은 삶을 부여하고 괴롭힌 이들에 복수를, 그리고 자신의 삶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음을 증명하기로 맹세했다.

 

 

 티끌 하나 없이無塵 맑은 인간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오욕칠정五慾七情을 버리고 신선의 반열에 들지 않고서야 인간은 소용돌이치는 감정과 욕망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불합리와 비정함이 판치는 현세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정의를 세웠고 머릿수만큼 존재하는 정의가 마주쳤을 때 충돌은 필연적이라. 누군가의 선행이 다른 이에게는 악행이 되고, 또 누군가가 행한 악이 오히려 다른 이에게 선이 되는 모순이 반복되는 나날들. 개인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기에 그 안에서 자신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칠 뿐이라.

 

 

 손에 쥔 것이 그저 저 하나의 목숨뿐이라면 발버둥을 멈추고 끊어지게 두었으랴만, 저에게 무엇인가를 바라고 생을 의탁한 이들을 거둔 이상 지켜야 할 의무가 있기에 태만할 수 없어서. 마음대로 주저앉을 수도, 무너질 수도 없다. 숙신은 이를 악물고 청휘의 품에서 뻣뻣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채리. 너는 계획대로 경조윤부에 이 시신을 보내고 사정을 설명하거라. 변수가 생기거든 임기응변으로 처리한 뒤 사후보고를 철저히 하라 이르고. 또한, 명일부터 함양의 일을 조사하고 온휴의 행방을 알 단서를 수색한다."

 "역시 우리 공주 전하. 주군의 덕목 중 하나인 자애로움을 발휘해 수하의 누명을 풀어주시려는 거지요?"

 "터무니없는 소리!"

 

 

 자애롭다는 말에 공주가 버럭 짜증을 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방령 십 세에 불과한 어린아이라. 낯간지럽고 속내를 찌르는 단어에 몹시 민감하게 반응하여 미숙함을 드러낸다. 의표를 찔려 씨근거리던 공주는 안경 쓴 채 빙글빙글 웃는 채리의 꼴에 부아가 치밀어 어깨를 탁 내리쳤다. 아얏, 하나도 아프지 않으나 주인의 기분을 더 상하게 하기 싫었던 채리가 엄살을 떨며 어깨를 어루만진다.

 

 

 "건국 이후 이백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연적하의 위명도 잊혀진 지 오래. 하물며 연가에 이 검이 있다는 사실은 이인인 나조차 얼마 전 채리 네가 일깨워주어 알았지."

 "덧붙여, 연가의 여식 이야기는 저도 금일 처음 들었사오니."

 "심원을 이루는 첫 걸음부터 이리 험난하니. 의문점이 많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암담할 지경이다!"

 

 

 청휘가 허리춤에 채워둔 검. 연무진은 단순한 보검으로 알고 있으나, 차라리 마검이자 요물이다. 태조 건원제建元帝를 보필하여 창궐하던 요괴와 귀신들을 제압한 위대한 술사이자 이인 자하랑. 그 여인이 어느 날 용궁을 빠져나와 육지에서 살생을 일삼던 용생구자龍生九子 중 일곱째를 발견하니 그 이름은 애자睚眦라. 늑대를 닮았고 천성이 살생을 좋아하여 육지 인간들에게 피해를 입히니 자하랑이 그를 제압해 검의 형상을 입혔다. 또한 수백년 된 신목神木을 베어다가 검집을 만들고 막내 제자 연적하의 피로 봉인을 완성하여 그에게 수호를 명하니. 세월이 흘러 본성이 누그러지면 용궁에 돌려주라는 분부한 스승이 대붕으로 화하여 승천하자, 적하는 협객의 신분으로 전국을 떠돌며 축사를 행했다. 고향인 함양에 처자식을 두었는데 적하 사후 그 아들이 부친의 뒤를 이었으나, 요괴와 귀신들의 원한을 견디다 못해 손자 대부터는 함양 백성들과 어울려 평범한 삶을 살았다. 구전 속 이인 협객의 위명도 잊혀진지 오래.

 

 

 연가에 비극이 일어나 검집이 사라지고 봉인이 풀렸다. 검을 통제할 수 있는 자는 봉인에 피를 바친 연적하의 직계 후손뿐. 구름과 같이 대가 멀어져 피의 효력은 이번 대가 마지막. 적절한 시기를 보아 연가에 방문하여 사정을 설명하고 용궁에 검을 반납하면 되었는데. 인세에 한 가지 근심을 없앨 기회였는데! 숙신의 아미가 한껏 내 천자를 그렸다. 골치가 다 아프다. 지금은 자신의 피를 먹고 잠들었기에 봉인 부적이 통하나, 효력이 떨어지면 언제든 깨어나 폭주할 터. 저 설익은 복숭아가 자질을 갖추기 전까지 이 짓을 반복하다간 몸 안의 피가 죄 말라 명을 다하리라.

 

 

 검과 무진의 일 꼬인 것을 처리하기만도 버거운데 온휴의 존재는 더욱 큰 난제까지 얹혀 심장이 멎을 지경이니. 온휴... 어떤 자가 해괴한 요설妖說을 지껄여 산 자에게 그따위 이름을 붙이게 하였는지! 분기탱천하여 주먹을 쥐었다 폈다 추스르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청휘와 채리의 안색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사건 전까지 철저히 숨기고 보호한 것조차 이미 대단하니. 그 아이를 보살폈다는 도인의 실력과 지식은 상당할 것으로 짐작되나, 성장할수록 강해지는 기운을 억누르고 무한히 막아내기란 불가능할 터. 한시라도 행방을 찾아내 보호해야 한다.

 

 

 공주부의 힘이 미약하고 손이 부족하야, 일에 우선순위를 세워 처리함이 마땅할지니. 숙신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현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검집을 다시 제작하여 봉인을 갖추는 것. 검의 주인인 연무진이 성장하여 검을 제어하고 피를 씻어내 용궁에 반환할 수 있도록. 그 다음으로 온휴의 행방을 추적하고 연가의 참극을 조사하되, 유일한 증인인 강 씨도 지켜보아야 한다.

 

 

 "최우선적으로 검집에 쓸 목재를 수배해야겠다. 헌데 수백 년 수령의 나무를 어찌 구하며, 마땅한 대장장이가 있겠느냐?"

 "목재라면 조거藻居 님께 부탁해봄이 어떠신지요?"

 "하! 노옹의 고집이 보통이 아니다. 얼마 전 황실에서 여름 별궁을 증축하느라 근처 산림을 많이 훼손하였는데 과연 우리 청을 들어주겠느냐?"

 "그 분의 성정이 완고함은 잘 알지만 속전속결로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필요불가결한 상황. 우리 쪽에서 이 검을 보이고 솔직하게 사정을 설명한다면 분명 도움을 주실 거예요."

 "내키지 않지만 한 시가 급한 일이니 허리를 숙여야겠지. 수도 인근에 아직 머물고 계신다더냐?"

 "예. 채리가 서찰을 보내 공주부에 모시고, 공자께서 기력을 회복하는 즉시 만나뵐 수 있도록 채비하지요. 채리가 아는 대장장이가 있어 준비가 되는 즉시 제작에 착수하겠나이다."

 "내 너를 믿으니 이만 물러가 그대로 행하라."

 

 

 채리가 이만 물러감을 청할 찰나.

 

 

 "한 가지 더. 영춘궁榮春宮에 서신과 선물을 보내라."

 

 

 혜빈께 전갈을... 단순한 문안 서신은 아니지요? 숙신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뒷말을 덧붙였다. 태기胎氣가 안전히 자리 잡았으니 슬슬 혜빈도 회임 소식을 알릴 시기를 재고 있으리라. 이쪽에서 운을 띄워주면 동생의 탄생을 질투하지 않고 오히려 응원하는 모양새로 비춰질 터. 혜빈은 명분을 쥐어주면 실리를 기어코 챙길 사람이라.

 

 

 어머니가 받은 총애와 영광이 곧 자녀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하는 황궁의 생태에 따라, 후천적으로 묶인 모녀는 곧바로 동맹을 맺었다. 숙신이 이인이자 공주라 가능한 일이었다. 혜빈이 황자를 낳아도 숙신은 계승권이 없는 공주라 태자 자리를 둔 경쟁에 참가할 수 없고, 황녀를 낳는대도 부마를 들이는 일에 다툼이 발생하지 않으리라. 이한의 사내들이 이인을 아내로 맞지 않으려 할 것이요, 사람들은 이인을 자기 가문에 들이지 않으려 혈안이 될 것이니. 가련한 처지의 공주를 제 밑으로 들여 송 태비와 황제의 환심을 샀으니 철저한 거래의 결과라. 이처럼 황궁 안에는 거짓과 음모와 고독뿐이라 친혈육 간에도 상잔相殘을 일삼는다. 헌데 함양에서 온 소년은 혈육을 위해 제 목숨까지 걸려 하니.

 

 

 "....혈육의 정이 과연 무엇일까."

 "예?"

 "아무것도 아니다. 내 몹시 피로하니 이만 침소로 가자꾸나."

 

 

 효심을 담은 상투적인 문구에, 임산부에게 좋은 몇 가지 약재를 더하여 보내라는 지시를 마지막으로 숙신은 청휘의 목에 팔을 둘렀다. 청휘는 자연스럽게 공주를 안아들어 접견실을 떠났고, 채리는 즉시 공주의 지시대로 수하를 움직였다.

 

 

 부를 연 지 고작 6개월. 송 태비와 혜빈이 시종을 구해준다 하였지만 전부 고사했다. 사람을 구하기는 쉬우나 믿을 수 있는 이를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 궁여지책으로 수도 인근에서 수행중인 하급 정괴精怪를 모아다 사람의 형상으로 둔갑을 시켜 공주부에 몸담게 하고, 수도 바깥의 일은 채리가 쌓은 연줄을 통하여 살피는 나날들. 공주의 성장과 공주부의 세력 확장이 흥망성쇠를 가를 것이라.

 

 

 가을 바람이 분다. 이 밤이 지나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허나 아직은 사방이 고요하니 사람들은 앞에 닥쳐올 풍랑을 모르고 곤히 잠들었는지라.

 

 

 

 이사씨異事氏는 한 소년의 탁생기 옮기는 것을 이 밤에 마무리 짓는다.

 그저 오래도록 조용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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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합작은 에본(@Ebon_nim)의 2차 지인제 글 합작입니다. 일체의 무단 전재 및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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