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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은 소문보다 초라하다

w. 청호

 혁명의 바람은 더이상 겉잡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명확한 크기로 황궁을 덮쳤으니 성벽 안팎으로 비명이 혼잡했음은 의심할 여지없었다. 황제는 혼탁한 하늘 아래서 결국 추한 도망 대신 죽음을 택했다.

 처형식이 며칠 남지 않은 가을 끝자락. 거리를 걷자면 아직도 수많은 소문이며 경험담이 들썩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끈질기게 살아남은 이야기는 혁명군 사령관과 황제의 대면에 관한 것이었다. 백성―시민들은 더 이상 하늘의 아들에게 머리 조아릴 필요 없었으니, 사건은 망설임도 없이 왜곡되었다. 사령관이 황실 가솔들을 베어 넘긴, 붉은 피 뚝뚝 떨어지는 칼끝을 황제의 목에 겨누며 말했다더라. 아니다, 칼은 더이상 쓸 수 없게 되어 황제의 보검을 빼앗아 쥐고 외쳤다더라. 아니다, 황제가 그에게 하사했던 검을 부러뜨려 그 앞에 던져놓았다더라. 말들은 하루에도 저잣거리를 몇 번씩 휘돌았고, 한 바퀴 굴러 원점으로 돌아올 때마다 꼭 한 가지 과장이 진실 되어 덧붙었다. 간혹 붉은 패를 허리에 찬 이들이 순찰하다 눈을 부라리곤 했지만, 그것은 제 존경받는 사람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라는 엄포였지 황제에 대한 존경심 따위에 기반한 것 아니었다.

 덧붙은 말들은 전부 황제의 모멸을 즐거이 맛보는, 조금은 비틀어진 웃음이었다. 억눌렸던 것들이 터져 나오며 마약처럼 통쾌함을 뱉어냈다. 사람들은 며칠 뒤 죽어 거리에 매달릴 그의 몸뚱이를 상상했다. 누군가는 피가 끓는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아무도 황제를 동정하지 않았다. 황실이 그들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았듯, 황제 또한 그들에게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혁명군 사령관은 매일 밤 황제를 가둔 곳으로 향했다. 서슬 퍼런 대검을 움켜쥐고 경비병들을 전부 물린 그가 밤새 무엇을 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사령관 자신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제 가장 내밀한 수하를 제한 어느 눈도 빛나고 있지 않음을 확인한 뒤에야 한숨을 쉬는 것으로 밤의 문을 열었다. 대검은 바닥에 가지런히 놓였고, 상처 가득한 흰 손등도 그러했다. 대청마루에 엉덩이를 붙이고 기적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야 끝자락에 걸리는 아름다운 처마를 본다. 별빛 가득한 새까만 하늘보다도 그 처마가 더욱 중하다. 어릴 적 궁 안에서 붓끝 놀리던 순간을 떠올리는 것이다. 작은 호롱조차 밝히지 않은 방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지 않아도 되었는데.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것은 아주 간편한 기만이었다. 부드럽게 대화 잘라내는 목소리는 법도에 능했으며, 상대를 무시하는 데에도 능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무시하는 상대가 일국의 황제라 칭송받은 시간을 되짚어보자면 더욱이 그랬다. 기적하 누군가를 무시하기보다는 직시하는 것을 더욱 선호했으니, 며칠째 반복된 기이한 태도는 해설을 붙이기 쉽지 않았다.

 사령관 또한 떠도는 말들의 결을 알았다. 부러 찾아 듣지는 않았으나 그의 막사 주변을 지나면서도 입을 조심히 놀리지 않는 이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기적하는 가끔 웃기도 했다. 내가 그 사람을 무릎 꿇렸다고 생각하는구나. 실지로 그날, 체포의 현장에서, 그 마지막 날, 유예기간이 끝났음을 드디어 두 사람 모두 인정한 그 순간 무릎을 꿇은 것은 황제가 아닌 사령관이었다. 혁명군의 수장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친위대를 베어 넘기느라 온통 축축한 핏물이며, 그들의 흉흉한 기세에 두들겨 맞은 몸뚱이를 내어놓고 몸을 낮췄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순간 황제가 물었다.

 

과인이 거할 곳은 어디인가?

 

 사령관은 여태 고개를 숙인 채 아뢰었다. 초연한 음성이었다.

 

이들이 냉궁에 침소를 마련해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터질 것만 같던 감정이나 숨소리들은 그 자리를 견뎌내었다. 혁명군은 더 큰 선을 위해 침묵하였고, 친위대는 절망과 혼란에 멈추어 섰다. 사령관은 황제가 가장 현명한 방법을 택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품위를 내동댕이치지도, 유치한 오만으로 불호령을 내리지도 않았다. 생명줄을 조금이나마 연장했고, 혁명군에게는 큰 패를 쥐어주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고개를 주억이지 않을 수 없을 법한 행동이었다. 납득할 만 했다.

 그러나 기적하는 아직도 알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는가. 그의 말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납득하였는가. 납득하고 싶은가. 내일이면 성문 앞에 교수대가 세워질 것이고 이튿날엔 형이 집행될 것이다. 이것이 옳은 일임을 알았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하지만 문득. 문득 저 처마의 생생한 빛깔이 기억이며 감정을 들쑤시는 것이다. 사령관은 사지와 혀를 능숙하게 놀릴 수 있게 되자마자 황궁에 발을 들였다. 빳빳하게 곧추세운 어린 몸은 황태자의 친우로서, 호위로서 존재했다. 그는 전대 황제의 친왕을 보필하며 구중궁궐의 심지어는 냉궁의 풍경까지도 전부 눈에 담았다. 머리가 굳기 전 전하殿下라는 격식 외에도 입에 담을 언어를 허락받았으며, 그보다 더한 조심성을 뼈에 새기게 되었을 즈음엔 고귀한 눈동자를 마주 볼 수 있었다. 특권이었다.

 기적하는 그 모든 시간을 무던히 지나왔다. 그랬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또 그랬기에 잊을 수 없었다. 황태자는 황제가 되었고 전하는 폐하가 되었으며 기적하는 근위대장이 되었다. 힘을 바라지 않는다 공언한 이후. 그러니까 무언가를 갈구하던 귀족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이후, 권력 다툼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선 인간을 보는 감정은 기묘했다. 그가 어떠한 탐욕도 겉으로 내어놓지 않은 채 말을 아끼는 사람이었기에 더욱더 그랬다. 황제는 옥체에 상흔 남기는 바람결을 그대로 두었다. 소모적인 시간이 지나갔으나 멈추지 않고 그따위 저급한 갈등에 자신을 내어놓을 뿐이었다. 기적하는 궁금했다. 저토록 흔들리지 않는 황제가 간혹, 오랜 시간 신뢰를 다진 근위대장에게 내비치는 눈빛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죄책감과 탈력 뒤엉킨 그것의 이유는 무엇인지. 허니 실낱같은 경우의 수를 붙잡고 종착역 더듬던 그가 홀연 종적을 감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근위대장은 오래 공석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제 화살을 읽으셨습니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서 그는 작게 안심한다. 본능적으로 윤허를 좇은 것에 불쾌감을 느끼기도 잠시, 할 말이 밭다.

 

이제 와서 꺼내기에는 낯간지러운 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날엔 하늘이 맑았다. 제국의 근위대장 기적하. 그 묵직한 이름표 떨어진 자리에 새로운 이름이 달릴 참이었다. 그는 사령관이라는 이름이 단지 직위만 뜻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 이름을 다는 순간 자신의 황제를 등지고, 그를 베어야 했다.

그랬기에 더더욱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기적하 황제를 사랑했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뛰고 말할 수 있던 시절부터 몸이며 마음을 바치겠다 맹세하였고, 군신의 맹세에도 감히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옥안에 피어나는 웃음을, 미미하게 비추는 한탄을 알았고 자신을 진정으로 믿는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이의 등에 칼을 꽂기 전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어찌 위험을 감수하지 않겠는가.

 별궁은 비밀스러운 출입구가 유독 많이 생겨나고 메워지는 곳이었다. 후원과 이어지는 담벼락 넘어, 숲속 험하게 가로지르는 오솔길을 따르다 보면, 가장 높은 탑에서나 시선 닿을 오래된 나무가 하나 있었다. 기적하 두꺼운 가지 위에 기대앉아 마음을 다스리고 시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공기 찢는 소리와 함께 살이 시위를 떠난다. 눈을 느리게 감뜬 뒤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인다. 마지막으로 예를 표한다.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황궁 저 깊은 곳에서 낮은 비명이 들려왔다.

 

이상한 일입니다. 절대로 하지 않을 선택을 하필이면 그날 했다는 게 말입니다. 서신이 당신께 도달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짧은 침묵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당신을 사랑한 것을 후회한 적 없습니다.

 

 대답은 없다.

 

그때도, 천지가 뒤집힌 지금도 그렇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어렴풋이 들리는 숨소리가 아니었다면 거리에 매달리는 치욕을 피하고자 자결하였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사이에 남는 고통을 평생 곱씹게 되겠죠. 근 며칠 동안 이 이야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기적하 순간 창호 너머에서 제 이름을 들은 것도 같았다. 무던한 목소리에 맞장구치듯, 저 처마에서 빗방울 떨어지던 날처럼 차분한 음성으로 불린 것 같았다.

 

황궁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전투를 치렀습니다. 다친 몸보다도 마음이 죄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대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회피하는 비겁자가 아닙니다, 폐하. 직면합니다.

사령관.

아무 말씀 마십시오. 제 얘기만 하겠습니다. 당신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겠다 결정한 것은 백성들뿐만이 아닙니다.

 

 별은 빛나고 바람은 부드러웠다. 기적하는 황제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상상한다. 고요가 그렇게 지나간다.

 

보고 싶을 겁니다.

사령관.

 

 거부당했음에도 비어져 나온 목소리는 먼젓번의 것보다 훨씬 미약했다. 어느 모로 보아도 생을 갈구하는 음성은 아닌 것이 그를 슬프게 했다. 기적하는 하려던 말을 내려놓은 채 작게 웃었다.

 

이름을 불러주셔도 좋을 텐데 말입니다.

 

 질기게도 대답이 없어 사령관은 미약한 신음을 벌써 그리워한다. 마루 위에 놓인 손가락 옴작대며 어릴 적 부르던 노래의 박자를 좇는다. 황태자 그 노래를 들으며 어렴풋이 웃곤 했으나…… 처마 끝에 달빛이 걸린다. 그저 오래도록 조용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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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합작은 에본(@Ebon_nim)의 2차 지인제 글 합작입니다. 일체의 무단 전재 및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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