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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생기托生記

w. 디플라디아

 

 

 

 

 

 

 

 

 

 

 

 영명永明 10년. 제국 이한利漢의 수도, 태선성台璇城.

 

 

 "고개를 들라."

 

 

 바닥에 납죽 엎드린 이의 위로 떨어진 평신平身의 말은 냉엄하기가 만년설과 같고 감언으로라도 곱다 말하기 힘든, 노파의 그것처럼 잔뜩 쇳소리가 섞여있다. 공포에 질린 소년이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니, 주렴 왼편에 선 이가 주인의 뜻을 매끄럽게 읊었다. 공주 전하의 뜻을 받드세요. 그제야 소년은 덜덜 떨며 고개를 들었다. 푸르고 붉은 구슬을 엮어 만든 주렴 뒤에 앉은 소녀가 바로 이 저택의 주인이자 이한 황제의 따님- 숙신淑晨 공주. 주렴에 상반신이 가려 공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천청색과 치자색 실로 금붕어를 수놓아 물결치는 적색 치맛자락이 접견실 안에서 가장 선명히 그녀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매서운 시선이 자신을 집요하게 쫓는 것을 느낀 무진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도원경을 그려낸 6첩 병풍 앞 접견실 상석에 숙신 공주가 느슨하게 기대어 앉았고, 우측으로 신선의 풍모를 지닌 미남자가 목석처럼 서 있다. 족히 8척은 되어 보이는 장신에 구름이 낀 듯 흐린 은발과 맑은 가을 하늘빛 눈동자가 무척 인상적인 이인異人이라. 남녀를 가리지 않고 머리칼을 기르는 것이 이한의 풍습이나, 그는 미간을 덮는 앞머리와 등 뒤에 가느다랗게 땋아내린 뒷머리를 제외한 머리칼을 짧게 잘랐다. 활동성을 중시한 감색 무복 차림으로 미루어볼 때 공주의 호위임이 분명하니.

 

 

 좌측에 선 이는 석류를 연상시키는 진홍색 머리칼을 지닌 이인으로, 북방식으로 깃이 목을 덮는 녹색 상의에 춘유록색 바지를 입었다. 특이한 점은 수정을 깎아 만든 안경을 썼다는 것. 무진武珍에게 공주의 뜻을 부드럽게 읊어준 사람이나 겉모습과 목소리만으로는 도저히 성별을 분간할 수 없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소년에게 안심하라는 듯 빙긋이 웃어보였다.

 

 

 좌우에 이인을 거느리고 그 자신도 이인인 숙신 공주에 대해 항간에 알려진 이력은 아래와 같다.

 

 

 이한을 다스리는 영명제永明帝는 정궁 황후를 비롯하여 후궁에 무수한 미인들을 거느렸는데, 황후 소생의 적자녀는 없고 비빈들에게서만 황자 셋과 황녀 다섯을 두었다. 황제의 둘째 딸, 숙신 공주는 기이한 용모를 지닌 이인으로 태어나 총애는커녕 냉대 받는 처지였다. 공주의 생모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나돌았는데, 대체로 비천한 신분이라 외척의 도움을 받지 못해 더욱 천대받는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보통 황자녀가 3세를 넘기면 봉작을 받는 이한 황실에서 10세가 되도록 봉작 없이 일개 황녀의 신분으로 궁에 기거했고, 선선황의 후궁이었던 송 태비太妃가 양육에 힘썼으나 궁인들은 대놓고 어린 황녀를 무시하고 괴롭혔다. 부황의 관심에서 멀어진 그녀의 어린 시절은 결코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허나 하늘이 무심치 않았는지 그녀에게도 개명할 날이 왔으니! 1년 전 내궁에 침입한 요괴가 영명제를 위협할 때 어린 황녀가 분연히 일어나 이인의 능력을 발휘해 요괴를 물리치고 부황을 구하여 종묘사직을 보전하였다. 냉정하던 황제의 마음이 하루아침에 눈 녹듯 풀려 손수 숙신의 봉호를 내리고 진귀한 하사품을 줄지어 공주 처소로 보냈다. 또 공주를 진 첩여의 소생으로 공표하고, 진 첩여를 정 2품 구빈九嬪에 봉하니 이가 곧 혜빈惠嬪이라. 자신의 생명을 구하였으니 소원을 청하라는 부황의 자애에, 공주는 고두하며 한 가지 청을 올렸다. '이인으로써 계속 궁에 기거할 수 없으니 황궁을 나와 자유로이 살 수 있도록 허하여 주옵소서.' 영명제는 잠시 망설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공주의 청을 받아들여 북서 거리에 널찍한 저택을 짓고 친필로 황금 편액을 내걸어 부의 개창을 도성 전체에 선포하였더라.

 

 

 황족과 귀족의 저택은 주로 번화한 수도 동남쪽에 위치했으나, 세상에는 예외가 있는 법. 비교적 한적하고 고요한 북서 거리. 담청색 기와를 올린 대저택 담장 안에는 이한 황실을 상징하는 황색 깃발이 바람이 불 때마다 나부끼며 지나는 이들을 억눌렀다. 대문에 걸린 황금 편액은 영명제가 친히 하사한 것으로 이 저택 주인의 영광을 드널리 알린다.

 

 

'숙신 공주부'.

 

 

 무진은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차라리 혀를 깨물고 싶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혔다. 가족을 잃고 누명을 뒤집어쓴 몸으로 유일한 혈육인 누이동생을 찾기 위해 헤매이다, 이인이라 불리우는 공주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항설港說 속 공주는 위기에 처한 소년의 마음속에서 영웅으로 자리 잡았다. 이인이라는 신비한 출신. 냉대 받았음에도 효심을 위해 과감히 행동했고, 마침내 총애를 입어 영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칭송과 미담. 일면식도 없는 일개 백성이 감히 공주께 청을 넣고자 공주부의 마차에 오체투지한 결과 오늘과 같은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으니 누구를 탓할까.

 

 

 마차에 뛰어들어 무어라 소리친 뒤 까무룩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 보니 사흘이란 시간이 지나있었다. 기절한 것에 비해 부상이 크지 않아 제 몸을 한참 살피며 의아해하고 있을 무렵. 시종이 들어와 공주의 부름을 전했고 그대로 접견실에 끌려오니 천라지망에 걸린 새앙쥐 꼴이라.

 

 

 평신을 허하였는데도 감히 일어나지 못하는 소년의 모습이 퍽 보기 기껍고 우스웠는지, 쇳소리가 섞인 웃음이 방 안을 채운다. 썩어도 황족은 황족. 몸과 언어에 배인 위엄에는 천성적으로 위압의 힘이 서려 고관대작들조차 움찔하는데,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소년에게야 말해 무엇하랴.

 

 

 "백주대낮에 공주부 마차에 뛰어든 무뢰배를 잡아왔더니, 기껏해야 덜 익은 복숭아라니! 이 숙신의 체면이 말이 아니로다!"

 

 

 참으로 흥미롭구나. 흥미로워. 숙신은 희소하는 것을 멈추고 팔걸이에 걸쳐두었던 불진佛搢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흰 말의 꼬리로 만든 백불白佛. 작은 손으로 쥐기에 버거운 크기였으나 총채처럼 휘둘러 소년을 마음껏 조롱하였다.

 

 

"너는 일개 평민의 몸으로 공주부의 마차를 막아선 것도 모자라, 몸을 내던져 마차에 흠을 내었다. 마부가 재빠르게 대응하지 않았다면 나 역시 해를 입었을 터. 이는 필시 황족을 모해하려 함이렷다?"

"아닙니다! 소인, 공주 전하께 해를 입힐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저 공주 전하게 청이 있어…."

"지금 네 나이 어림을 방패삼아 나를 기만하려 함이냐?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리했는지 순순히 고한다면 시신은 온전히 보전해주마. 역적 황모黃某의 잔당이냐? 아니면-."

 

 

 공주 전하, 이만하면 충분한 듯싶습니다. 회생한지 반나절도 안 된 이를 두고 희롱하시니 또 혼절할까 두렵나이다. 주렴 너머에서 언짢은 음성이 이어진다. 채리彩莉야. 네가 지금 저 아이를 걱정하여 공주의 말을 자르는 것이냐? 그가 얼른 예를 취하며 답한다. 채리가 어찌 주인께 그런 불충한 마음을 품겠나이까. 다만 중요한 것을 잊으실까 하여.... 신경질적으로 주렴을 좌르륵 스치는 소리가 그의 말을 자른다. 네가 이처럼 주인 앞에 경망되이 구니 내 흥이 깨졌느니라. 언짢음과 심드렁함이 섞인 어조. 숙신은 귀찮은 듯 불진을 한 번 내저었고 그에 맞춰 채리- 붉은 머리칼의 이인이 천천히 나아가 소년의 앞에 멈춰 섰다.

 

 

 녹색 옷자락이 스치우자 말리꽃 향이 진동하여 무진은 순간 누이동생이 떠올라 눈시울을 붉힌다. 누이와 함께 철마다 핀 꽃을 꺾으며 뛰놀던 어린 시절이. 말리꽃을 제일 좋아하여 자수 연습을 할 때도 늘 말리꽃을 수놓던 작고 가녀린 아이. 동생을 떠올리자 슬픔이 넘쳐흘러 몸을 떨었는데, 채리의 눈에는 긴장과 두려움으로 인한 것처럼 보였다. 그대가 참으로 가련타. 채리는 소년의 앞일을 생각하고 아주 조금 동정하는 마음을 품었다. 이 순진한 소년은 자신이 얼마나 복잡하고 거대한 모략에 연루되었는지 모르리라.

 

 

 그 모략이 소년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음이니.

 

 

 "연무진燕武珍."

 "…!"

 "함양咸陽 출신. 이름은 진선眞鮮. 사람들에게는 아호雅號인 무진으로 불림. 올해 열 넷. 한 달 전 함양에서 벌어진 연가 살인사건의 생존자인 동시에 유력한 용의자."

 "어, 어찌 그것을…!"

 "공자께서 기절한 사이, 함양 태수 팽중彭仲이 수도로 파발을 보냈습니다. 살인죄를 범하고 도망친 죄인이 함양을 빠져나가 수도로 향했다는 내용이겠죠. 경조윤부京兆尹府가 한바탕 뒤집어진 뒤 태선성 사방에 용모파기가 걸렸지요."

 

 

 단 하룻밤 사이 연가 일족과 하인을 합쳐 총 서른두 명의 인원 중 스물아홉 명이 살해당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연가 첫째 부부의 적자녀 남매와 집안일을 처리하던 집사 강씨. 마구간 거름통에 몸을 숨겨 화를 피했던 충복 강 씨는 날이 밝자마자 관아로 달려가 이 참상을 알렸고, 범인으로 연가의 적자 무진을 지목했다. 도련님이 가문에 전해 내려오던 보검을 훔쳐내 저택 안 사람들에게 휘둘렀다는 것. 강 씨의 말대로 다수의 시신에서 예리한 자상이 발견되었고 사당에 엄중히 보관되어 있던 보검 역시 연무진과 함께 종적을 감췄다. 고작 이칠의 소년이 단독으로 스물아홉 명을 살해했다? 모두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여겼다.

 

 

 허나 사건이 일어났던 날 저녁, 연가에 큰 경사가 있어 신분의 귀천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시며 기쁨을 나눴는데, 독하지 않은 술임에도 그것을 마신 사람들이 곧 인사불성이 되었다. 연가 안주인과 주방의 시녀들이 처음 술을 맛보고 이상 없음을 확인한 뒤 술통을 봉하여 주방 옆방에 옮겨놓았는데, 연회 직전 도련님이 그 방 앞을 자주 기웃댔다는 강 씨의 증언이 이어졌다. 관원이 술통에 남아있던 술을 꺼내 맛보니 과연 사람을 취하게 하는 약이 들어있었고, 무진의 처소에서 동일한 약이 발견되었다. 강 씨는 아침부터 배앓이가 심해 술을 마시지 않아 멀쩡하였다. 이 끔찍한 비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하고도 거름통에 몸을 숨기고 제 목숨만 구했다며 주인 일가의 불행과 자신의 불충에 가슴을 뜯으며 통곡하니. 십 수 년 간 연가를 충심으로 섬긴 그를 함양의 모든 이가 연민하였고 동시에 극악무도한 죄를 범하고 도망친 무진에 대한 분노에 휩싸였다. 이후 이어지는 증언과 증좌들이 짜맞춘 것처럼 일치하니.

 

 

 수배령과 조사를 통해 알아낸 내용을 줄줄 읊는 채리를 보며 무진은 두 눈을 질끈 감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파국이다. 그저 신상불명의 평민 신분이었다면 인정에 호소라도 하였지만 도주중인 죄인임이 밝혀졌으니!

 

 

 네 너를 관아에 넘길까, 아니면 이 자리에서 장살에 처할까. 무진의 목숨을 저울에 올려놓고 품평하는 공주의 쉰 목소리에도 분노나 치욕을 느낄 수 없다. 누가 자신의 결백을 믿겠는가! 연가 문중은 무진의 이름을 족보에서 지웠고 친하게 지내던 벗들은 하루아침에 절연을 선언했다. 함양, 더 나아가 이한의 백성들에게 자신은 가족을 도륙하고 도주중인 극악무도한 살인범으로 낙인찍혔다. 세상에 남은 유일한 혈육인 여동생은 신상을 돌보던 도사의 손에 이끌려 수도 인근의 도관에서 만나자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헤어졌다. 저 혼자 결백을 주장한들 증좌도 증인도 없다. 더군다나 강 씨가 보았다던, 아수라장 속에서 피에 물든 검을 쥐고 있던 소년은 분명 자신이었다.

 

 

 절망에 잠긴 소년의 고개가 바닥에 닿을 듯 앞으로 기울어졌다. 끝없는 추격을 피해 도망치며 날이 갈수록 심신이 피폐해졌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의 말대로 자신이 살인자가 아닐까 하는 암귀에 사로잡힌다. 내 명도 끝인가? 가보를 잃어버리고 죄인의 몸이 되어 동생의 생사도 알지 못한 채 이렇게….

 

 

 "연무진."

 "예, 공주 전하."

 "함양의 연가라면 마땅히 적하赤河란 이름을 알렸다?"

 "예. 소인이 그분의 직계 후손 되옵니다만…."

 "허면 이 검이 네 것이렷다?"

 

 

 공주의 불진이 가리킨 것은 여태까지 말없이 공주를 호위하던 은발 사내. 무표정하게 받쳐든 물건을 본 무진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흉액凶厄이 저택을 덮친 날, 사당에 모셔두었던 검이 검집을 잃고 잔뜩 피를 머금은 채 무진의 손에 들려졌다. 집히는 천자락을 대충 휘감아 저택을 빠져나간 이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대로에서 벗어나 산을 탈 때 지팡이삼아 땅을 짚었고, 얕은 여울을 건널 때는 등에 지고 온 힘을 다해 헤엄쳐 나왔다. 수도로 향하는 관문에 이르러서는 관병의 눈을 피하려 행상의 짐마차에 몸을 숨긴 채 숨죽여 검문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밤마다 차가운 감촉에 의지해 억지로 수마睡魔를 쫓아낼 때 썼던, 고향을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물건. 얼룩지고 해진 천자락 대신 부적이 덕지덕지 붙어있었지만 길이와 너비, 검게 물든 손잡이, 고리와 코등이에 새겨진 검붉은 늑대, 장식 매듭의 형태만으로도 알 수 있다. 마차에 치이며 잃어버렸다 여긴 가보가 바로 코앞에 있다니.

 

 

 어떻게, 이것을 어찌…. 목이 메여 횡설수설하는 소년에게 너는 어떻게, 어찌, 이런 말 밖에는 할 줄 모르느냐고 타박이 이어졌다. 소년의 눈동자에서 희미한 빛이 떠오른다. 그것이 아니오라…. 도성 거리에서 잃어버려 다시는 찾을 수 없으리라 여겼습니다…. 죽기 전에 다시 볼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

 

 

 직전까지 절망에 빠져있던 복숭아가 고작 검 하나에 기운을 약간 회복해 우물쭈물하는 꼴이 참으로 우스워, 숙신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아직 관례를 치르지 않은 풋내기. 이 흉물의 정체도 모르고 희망을 품는 꼴이라니. 검집 잃은 검을 함양에서 수도까지 짊어지고 왔으니 담이 크다고 해야 할지, 아둔하다 해야 할지.

 

 

 자, 어쩔까. 이 작은 아이는 내 손 안에 떨어졌다. 실낱같은 희망마저 남김없이 꺾어 사멸케 할까? 그리하여 나락으로 떨어진 한 생명을 명부의 혼백으로 던져줄까?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으니 다른 이에게 넘겨 조리돌림과 오욕으로 얼룩진 이름을 후세에 남겨줄까? 그리하여 주인 잃은 검만 거둘까? 아니! 불가능한 일이라. 아직 도성에서 날개를 펼치기에 이 새는 연약하고 깃털이 채 마르지도 않았다. 적들 앞에 공주부의 세력은 아직 이란격석以卵擊石에 불과하니, 손 안의 패를 늘리고 키우기 위해서 훨씬 교묘한 모략이 필요하다. 황궁 안에서 하루하루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남몰래 키워온 이 판을 놓을 수 있을까보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다. 너와 헤어진 이후 생사를 알 수 없다는 여동생의 이름이 무엇이지?"

 "공주님과 동년배로, 온휴溫休라 합니다."

 "온휴? 정녕 온휴가 맞느냐?"

 "예. 동생이 태어났을 때 어느 도인이 찾아와 아이의 인생에 풍파와 부침浮沈이 가득하나, 이 이름을 붙이면 억누를 수 있다 하여…."

 

 

 숙신은 주렴 뒤에서 희소하였으나 채리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엷어졌다. 살아남은 연가 여식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고 강 씨 또한 그녀의 행방에 대해 알지 못한다 하였다. 아마도 평소 신병을 앓던 아가씨를 친분이 있던 도사가 피신시켰을 거란 추측을 내놓았을 뿐. 공주 역시 함양에서 일어난 비극에 대해 들었을 때 그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헌데 운명이란 참으로 얄궂어라! 그 아이의 이름이 정녕 온휴라니!

 

 

 적하여, 적하여. 내 옛날 태조를 섬기며 이 땅의 괴이를 물리치던 자하랑紫霞娘을 알고, 또 대붕大鵬의 마지막 제자인 그대를 아는데. 그대의 후예가 어리석은 선택을 하였노라! 그대가 남긴 세 보물이 모두 탐나는 과실이라. 악인의 손에 이용당해 비참한 꼴을 맞지 않게 내가 품어 맞갖게 쓰려 하노라.

 

 

 "연가의 아이야. 너는 살고 싶으냐?"

 

 

 그러면 너는 대답하리라.

 

 

 "소인,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면 감히 연명코자 합니다."

 

 

 네 대답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롱하리라.

 

 

 "네가 공주부의 마차에 달려든 것, 쓰러진 너를 공주부 문턱 안으로 옮긴 것을 본 이들이 많다."

 

 

 조롱을 감내하고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며 빈다.

 

 

 "그럼에도 소인은, 살고 싶습니다! 살아서 누명을 벗고, 여동생을 찾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네 죄를 인정치 않고 끝까지 누명이라 하는구나."

 "…소인은 결코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두 눈이 젖어있었고, 오동통한 뺨 위로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채리는 흥미로운 듯 코 위로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썼다. 공주 전하. 이제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연극의 결말을 낼 때가 온 듯합니다. 채리의 생각대로였다. 공주의 시선이 접견실 창문 바깥을 힐금 훑었다. 초경初更. 술초시戌初時를 알리는 북소리가 도성의 하늘에 울려 퍼지면 태양이 서녘 하늘로 내려가 세상을 붉은빛으로 물들인다. 한 마리 주작朱雀의 날갯짓처럼. 탐문하러 나선 관원들에게 공주부 마차에 실려간 소년의 존재가 알려졌을 터. 여지를 내어줄 수 없고 눈앞의 먹잇감을 놓칠 수도 없다. 공주부를 노리는 들개들이 성마른 울부짖음과 함께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들기 전에. 남김없이 먹어치워야 한다.

 

 

 "너에게 선택지를 주마."

 

 

 숙신은 소년의 앞에 손바닥 한 마디만한 단도를 집어던졌다. 눈물범벅이 된 무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거의 푸르게 보일 지경이라. 용도를 어렴풋이 짐작하였겠지. 칼을 뽑은 이상 누군가의 피를 보고서야 끝이 난다. 숙신은 소년에게 선택지를 강요했다.

 

 

 "자결하거나."

 

 

 혹은.

 

 

 "'연무진'을 죽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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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끔찍한 침묵이 흘렀다. 채리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띄웠고, 은발의 사내는 말없이 무진의 검을 쥐고 선 상태였고, 공주는 무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새파랗게 날선 단검을 목전에 둔 소년은 혼란에 빠져 공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결하거나, 연무진을 죽이라니. 결국은 둘 다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가?

 

 

 "무, 무슨 말씀이시온지…. 어찌되었건 소인이 죽어야 한다는 뜻이옵니까?"

 "이 아둔한 녀석!"

 

 

 답답한 듯 숙신이 팔걸이를 탁 내리쳤다. 잘 들어라! 결백을 증명해줄 이도 증좌도 없는 이상 연무진은 죄인의 굴레를 벗을 수 없으니. 죽음은 피할 수 없다. 허나 어디까지나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중인 연가 적자에 국한된 운명. 그의 죽음을 세간에 각인시킨다면 자연스레 시간이 흘러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살인 사건도 소년의 존재도 사라지는 것이다. 요는 즉, 연무진을 죽이고 다른 이의 신분을 얻으면 해결되는 일이라.

 

 

 공주의 계획은 이러하다. 즉시 경조윤부에 가짜 연무진의 시신을 보내고 최대한 유감스러운 어조로 설명한다. 지난번 공주부 마차에 뛰어들어 혼절한 소년을 데려와 정성으로 구완하였으나 끝내 졸하였다. 이에 관하여는 미리 매수해둔 의원을 통해 불운하게도 마차에 부딪히며 목이 부러진 모양이라 즉사하지 않은 게 용하다는 증언을 내밀 것이다. 신원미상의 시신을 어찌 처리할까 고민하던 도중 거리에 나붙은 수배령을 보았고 그제서야 함양에서 도망쳐온 죄인임을 알았다. 일이 이리되어 유감스러우나 이미 엎어진 물. 공주 전하께서는 공주부 마차에 사람이 치여 목숨을 잃은 것도 충격인데 그가 흉악한 범죄자였다 하니 두려워하고 계신다. 공주부는 이번 일을 최대한 조용히 넘기고 싶다. 이 일이 계속 밖으로 오르내리게 되면 피차 곤란하지 않겠는가?

 

 

 경조윤 임이간林怡杆은 심약하고 담이 작으니 적당한 수완으로 다스린다면 우리 뜻에 동조하여 조용히 사건을 처리할 것이다. 연무진의 시신은 수습할 이 없으니 무연고 범죄자를 처리하는 절차에 따라 처리될 것이요, 형부나 경조윤부의 요청으로 혹여 검시를 하더라도 걱정할 바 없다. 지극히 형식적인 절차로 변질된 검시로는 가짜 판명이 불가능하다. 주술 걸린 시신은 채리의 작품으로 그 효력이 다하기 전까지 진짜와 하등 다를 바 없다.

 

 

 그동안 연무진에게 주술을 걸어 외형을 바꾸고, 바깥에서 활동할 수 있게 새로운 신분을 준비한다. 새로운 신분은 송 태비에게 부탁하여 그녀의 친정에서 마련해주기로 했다. 태비의 친정은 북방 출신이라 그에 걸맞은 북방 억양과 사전 지식을 철저히 주입시켜야 한다는, 지극히 사소한 문제가 있지만 차차 해결하면 될 터.

 

 

 연무진의 나이 고작 14세. 아직 관례를 올리지 않은 햇병아리가 관아의 포위망을 벗어나 수도까지 왔다는 사실이 중앙 조정에 알려졌으니 함양 태수 팽중의 무능력함이 곧 도마에 오를 터. 팽중은 제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지금쯤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으리라. 빈약한 머리가 운 좋게 반짝하여 미심쩍은 부분을 찾아내 끈질기게 나올 확률이 아예 없진 않다. 허나 사후처리까지 마친 사건을 붙들고 늘어지는 모습을 중앙에서 과연 기껍게 여길까. 파발이 함양과 수도를 오가는 동안 시신은 이미 화장터에서 재가 되었을 테니 누구도 감히 의문을 제기할 수 없으리.

 

 

 "속세의 인간들이 일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적절한 시일과 준비가 필요하나, 나와 공주부의 식솔들은 전부 범인이 아니라. 공주부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다. 너는 진심으로 누명을 벗고 살고자 하느냐?"

 

 

 무진의 입이 크게 벌어져 턱이 빠질 듯하였다. 관을 속이고 죽은 척 한다는 것은 평범한 이들도 할 수 있으나, 그 후에 이어지는 말들은... 이인들이라 할 수 있는 발상인가? 살아남을 방법이 생겼다는 기쁨과 황망함이 뒤섞여 정신이 혼미해질 찰나. 사랑해 마지않는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렴풋이, 끊어질 듯이, 그 무엇보다 다정하고 부드럽게….

 

 

 - 무진아. 네 만일 생과 사의 기로에서 선택의 기회를 얻는다면, 너는 살거라. 사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돌이킬 수 없는 순간에 갇혀 평생을 괴로워할지라도.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부끄러울 것이 없느니라.

 

 

 아버지.

 

 

 - 내 갓 태어난 너를 산파에게서 받아 안고 감회에 젖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관례를 올릴 나이가 되었구나. 이 어미는 네가 이리 건강하고 구김살 없이 자라주어 기쁘기 한량없다. 어제 태선성 외숙부 댁에서 서신이 왔단다. 무진이가 관례를 치르거든 자기 집에 두어 달 데리고 있으면서 견문을 넓혀주고 싶다고. 네 평생 소원이 황제 폐하 계시는 태선성 구경 아니니. 아버지께서도 허락하셨으니 걱정 말고 준비하거라.

 

 

 어머니.

 

 

 - 이리 길게 오라버니와 떨어지는 건 처음이라 자꾸 겁이 나요. 함양과 수도는 가깝고 도로가 잘 정비되어 위험한 일 없을 거라 하지만…. 무서운 꿈을 꿔서 그런지 눈물이 멈추질 않아요. 오라버니. 온휴는 오라버니가 들려주는 바깥 이야기가 제일 좋아요. 태선성에 가셔도 온휴를 잊지 말고 편지해주실 거죠? 돌아오셔서는 온휴에게 수도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려주실 거죠? 약조해주세요.

 

 

 온휴야.

 

 

 그들을 잃은 날, 붉은 달이 떴고 사방이 고요하여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흔한 새나 개 짖는 소리조차 없었던 날. 평화롭던 저택 안이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도련님이라면 간도 쓸개도 다 빼어줄 순박하고 충성스러운 하인들, 방금 전까지 함께 웃고 떠들던 사촌과 숙부 내외, 오랫동안 무진 남매를 돌보아온 유모,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져있던 부모님. 정신을 차려보니 제 손에는 사당에 있어야 할 보검이 들려있었고 자초지종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들려온 비명 소리. 온휴의 목소리였다. 정신없이 그 아이의 처소로 달려갔으나 끝내 우리는 헤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그렇게 홀로 남겨져 방황하던 자신에게 살고 싶은가 묻는 이 아무도 없었다. 허나 공주는 물음을 던졌고, 기회를 주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네 자신을 망자로 만들고 다른 이의 신분으로 목숨을 이어나가고 싶은지 내가 물었다."

 "예, 살고 싶습니다!"

 "좋다. 그 대가로 이 숙신의 종이 되겠음을 맹세하라."

 "소인, 목숨을 다하여 공주 전하를 섬기겠습니다!"

 "아니! 네 목숨을 걸고 나를 섬기지 말라. 너는 나에게 생을 의탁倚託하고 나는 네 생을 지켜 다시 돌려주는 것! 이것이 우리의 계약이 될 것이다."

 

 

 촤르륵. 구슬이 어지러이 부딪히고 휘날리는 소리가 유독 선명하다. 두 겹으로 드리워진 주렴을 걷어내며 나는 소리.

 

 

 주렴이 걷히고 공주가 모습을 드러내자, 무진은 저도 모르게 신음하였다. 소문대로 이색을 지닌 이인이나 또래에 비해 체구가 작고 바늘처럼 말라 간신히 예닐곱살이나 되어 보일까. 금으로 만든 산호 장식과 붉은 끈으로 수연계垂練髻를 튼 머리칼은 새벽녘 갓 내린 초설初雪처럼 희었으며, 과장을 조금 보태 얼굴의 절반을 차지한 두 눈은 정오의 태양처럼 빛나는 정금正金의 색. 젖살 하나 없이 마른 뺨으로 인해 턱은 한결 뾰족해 보이고 창백한 입술을 고집스레 일자로 다물어 조숙한 인상을 주었다. 금붕어를 수놓은 적색 치마에 연보랏빛 저고리를 입고 꼿꼿이 선 모습은 바람 불면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허나 소년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한 치 흔들림 없이 올곧고 전신에서 맹렬히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금방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기회를 노리는 맹수와도 같으니! 자애롭고 기품이 넘치며 현명한 소녀라 세간에 알려진 것은 물론 자신의 상상과도 너무나 다르지 않은가!

 

 

 소년의 충격은 소리도 없이 가까이 다가선 공주로 인해 산산조각 났다. 주렴이라는 방해물을 치우고 시시각각 변하는 무진의 표정을 감상하는 것이 퍽 재미있는 듯, 금빛 눈동자와 가늘게 휜 눈꼬리에 짓궂음이 묻어나온다.

 

 

 "왜. 세간에 알려진 것과 내 모습을 보니 생각이 바뀌었느냐?"

 "아니…. 아닙니다…. "

 "네 뜻이 달라졌대도 감히 공주와 면대를 한 이상 다른 생각은 버리거라."

 

 

 가소로운 아해 같으니. 숙신이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두 번 치자, 접견실 밖에서 대기하던 두 명의 시녀가 나타났다. 한 명은 쟁반을 들었고 다른 한 명은 깨끗한 천 위에 겨우 잔 하나를 덮을만한 작은 은제 뚜껑을 받쳐 들었다. 쟁반을 든 시녀가 공주와 무진 사이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조심스레 쟁반 위 물건을 보였다. 쟁반 위에는 당초문唐草紋을 음각한 두 개의 은잔, 무늬도 자수도 없는 흰 색 명주 손수건 두 장, 사혈용 은침, 고약을 보관하는 칠보七寶 약합이 가지런하게 놓여있다. 두 은잔 중 하나에는 호박색 액체가 들어있고 다른 하나는 빈 잔이라.

 

 

 공주는 은침을 집어 왼손 검지손가락 끝을 살짝 찌른 뒤, 상처에서 배어나온 핏방울을 호박색 액체가 든 잔 안으로 떨어뜨렸다. 그러자 신기하세도 액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희미한 연기를 내뿜더니 검은색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소공자. 정신을 차리고 단도를 집으세요."

 

 

 채리의 말에 신기한 것을 목격하느라 잠시 정신이 팔려있던 무진은, 두어 번 헛손질을 하고서야 바닥에 놓여있던 단도를 집을 수 있었다. 그 동안 은발의 사내는 보검을 자신의 허리춤에 차고 명주 손수건 하나를 집어 공주의 손가락을 감싸 지혈했다.

 

 

 "소공자. 빈 잔 바로 위에서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낼 겁니다. 핏방울이 잔 안으로 들어가도록 최대한 가까이 위치하고, 손가락은 날 위에서 깃털을 스친다는 느낌으로 살짝 대기만 하세요. 손가락이 잘릴 수 있으니 절대로 힘을 주면 안 됩니다."

 

 

 손가락 끝에 아주 살짝 가져다 대었을 뿐인데 살갗이 순식간에 벌어지고 붉은 피가 흘러 빈 잔 안으로 후두둑 떨어진다. 곧바로 단도를 쟁반 위에 올려놓으라 하여 허둥지둥 올려놓고 되었냐 물으니, 채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손수건으로 상처를 싸맬 것을 권하였다. 따끔거리는 손가락의 통증. 이 다음에는 무엇이 이어질까? 초조하게 손수건을 집어 상처를 싸매고 다음 명령을 기다린다.

 

 

 그의 차례가 끝내자 숙신은 자유로운 오른손의 검지를 펼쳐 쟁반 위 단도에 묻어있는 무진의 피를 묻힌 뒤, 그대로 가져와 제 아랫입술에 슥 문질렀다. 가뜩이나 혈색이 없는 입술에 위와 아래가 극명히 나뉘니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호할 지경이라.

 

 

" 나 이한의 숙신 공주 유소하劉昭荷. 연적하의 후손인 진선 무진과 함께 천지신명께 고한다."

 

 

 담대하고 엄숙한 어조. 오래된 피의 맹세를 행하는 공주의 진지함에 압도되어 무진 역시 몸가짐을 바로 하였다. 문서가 아닌 구두 계약에 증인은 공주부 사람이 전부. 아무런 쓸모없는 계약이라 무진은 당장이라도 공주의 손에 죽거나 험한 꼴을 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로의 피를 두고 맺은 맹세는 한 차원 높은 곳에 매여서 어긴 자는 예외 없이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했다. 인외의 존재와 현상, 인간이면서 이색과 기이한 힘을 타고난 이인을 향한 멸시와 차별로 악명 높은 이한. 허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오랜 옛날부터 도교를 기반으로 불교가 혼재된 신앙을 신봉하여 사회 곳곳에 은밀한 주술의 흔적을 남겼고 이 맹세법 역시 그 중 하나라. 더군다나 피휘避諱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적용되는 국휘國諱의 수혜자- 황족이 자신의 휘를 입에 올렸다면 곧 가장 확실한 담보이자 이행장치로 작동한다.

 

 

 무진은 이 괴팍해 보이는 공주가 고작 일개 평민이자 수배자를 위해 피휘를 깨고 피의 맹세를 행한 것으로 엄청난 충격과 감동을 받았으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계약기간 동안 그는 나에게 절대 복종하고 배신하지 아니하고 충성으로 섬기며, 나는 그가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유일한 혈육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그가 나에게 생을 의탁하였으니 나는 마땅히 맡은 것을 보호하여 계약이 끝나는 날 반환할 것이다."

 

 

 힐긋, 숙신의 시선이 무진을 향하였다.

 

 

 "계약의 기한은 십 년으로 한다. 이에 영명 10년 9월 열사흗날 천지신명의 앞에 고하니, 이를 어긴다면 마땅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채리는 무진의 피가 들어있는 잔을 거두어 대기 중이던 다른 시녀에게 내밀었고, 시녀는 천에 올려두었던 은뚜껑을 들어 잔을 덮은 뒤 천으로 조심스레 감싸 밖으로 물러갔다. 쟁반 위에 남은 잔은 이제 하나. 공주의 피를 떨어뜨린 정체불명의 액체.

 

 

 "소공자. 잔 안에 든 것을 남김없이 마시고 공주 전하께 복종의 예를 갖추세요. 이것으로 계약이 맺어지고 공자의 용모를 바꾸는 주술이 발동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에 잔을 공손히 들어 올리자 검게 물든 액체가 찰랑거린다. 입가로 가져오니 약초 향과 뭐라 말하기 힘든 역한 냄새가 올라와 도저히 삼키고 싶지 않았으나…. 마셔야 한다. 멀고 고단한 길을 가기 위해 자신을 내려놓고 새로이 거듭나야 한다. 방금 전까지 연무진이었던 소년은 잔에 든 것을 단숨에 들이키고 주군을 향해 절을 올린다.

 

 

 "소인, 공주 전하를 충심으로 섬기며 본분을 다할 것임을 맹세합니다."

 

 

 손끝과 발끝부터 시작해 곧 온몸이 뜨겁게 끓어오른다. 비단 약기운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소년의 눈에는 공주의 하얀 머리칼이 월광을 머금은 것마냥 빛나보였다. 위장이 뒤집히고 뼈마디가 뒤틀리는 낯선 고통에 구토라도 하고 싶었다. 바닥이 붕 떠오르고 천장이 주저앉는 듯, 협탁과 의자를 비롯한 가구들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들린다. 감각이 이전과는 판이하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시야가 천천히 흐려진다.

 

 

 어느샌가 가득 찬 말리꽃 향기. 오라버니. 온휴의 맑은 웃음소리가 꿈결처럼 아득하게….

 

 

 푹 쉬세요. 자고 일어나면 이전과는 다른 용모로 바뀌어 있을 겁니다. 당신의 세상도요. 녹색 소매가 두 눈을 가리자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안녕히, 연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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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합작은 에본(@Ebon_nim)의 2차 지인제 글 합작입니다. 일체의 무단 전재 및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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